제3부 일반상대성이론
제8장 — 수성·빛·시계가 이론을 시험하다
예상 읽기 시간 약 17분
구름 뒤에서 판결을 기다린 방정식
1919년 5월 29일 아침, 서아프리카 프린시페섬에는 비가 쏟아졌다. 몇 달을 배로 이동하고 장비를 설치한 끝에 맞은 일식 날이었다. 태양이 달 뒤로 완전히 숨는 시간은 몇 분뿐이었다. 그 몇 분 동안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아서 에딩턴과 조수 에드윈 코팅엄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일식 자체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태양빛에 묻혀 보이지 않는 별들이 태양 가장자리에서 어디에 나타나는지를 사진에 담으려 했다. 아인슈타인이 옳다면 별빛은 태양 주위의 휘어진 시공간을 지나오며 아주 조금 방향을 바꾼다. 사진 속 별은 평소 자리에서 머리카락보다도 작은 각도만큼 밀려나 보여야 했다.
문제는 아인슈타인이 빛이 휜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옛 이론을 바탕으로 계산해도 작은 편향을 예상할 수 있었다. 계산 방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흔히 비교되는 값은 태양 가장자리에서 약 0.87초각과, 아인슈타인의 완성된 이론이 말한 약 1.75초각이었다. 사진판 위의 희미한 점들이 두 세계관 사이에서 판정을 내려야 했다.
프린시페에는 계속 구름이 흘렀다. 대서양 건너 브라질 소브랄에도 또 하나의 관측대가 같은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를린의 아인슈타인은 어느 쪽 하늘도 볼 수 없었다. 4년 동안 방정식 속에서 살아온 이론이 이제 그의 손을 떠나 날씨와 렌즈와 유리 건판에 맡겨졌다.
제7장은 아인슈타인이 중력을 시공간의 곡률로 바꾸는 데 성공한 순간에서 끝났다. 이번 장의 질문은 그다음이다.
자연도 그의 방정식에 동의할 것인가?
1. 수성이 먼저 건넨 사적인 판결
공개 재판에 앞서 아인슈타인에게는 이미 강력한 신호가 하나 있었다. 수성의 궤도는 완벽히 닫힌 타원이 아니다. 태양에 가장 가까워지는 지점, 곧 근일점의 방향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돌아간다. 다른 행성들이 잡아당기는 효과와 알려진 요인을 모두 계산한 뒤에도 100년에 43초각가량이 남았다. 달의 겉보기 지름을 수만 조각으로 나눈 것보다 작은 각도였지만, 뉴턴의 중력이 설명하지 못한 채 남긴 정확한 질문이었다.
1915년 11월, 완성되어 가던 이론으로 그 잔차를 계산하자 별도의 조정 없이 맞아떨어졌다. 아인슈타인이 관측값에 맞춰 자유로운 상수를 끼워 넣은 것이 아니었다. 등가원리에서 출발해 일반공변성과 보존법칙을 만족시키려 만든 방정식이, 전혀 다른 시대의 천문 관측이 남긴 숫자를 되돌려 준 것이다.
“이 계산은 수성이라는 행성에 대해, 근일점이 100년에 43″만큼 전진함을 준다. 반면 천문학자들은, 관측과 뉴턴 이론 사이의 설명되지 않는 잔여분으로 (45''\pm5'')을 제시한다. 이는 완전한 일치를 뜻한다.” —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설명한 수성의 근일점 운동」, 1915년 11월 18일
아인슈타인이 “기쁨에 겨워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 이유는 숫자 하나를 맞혔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1907년의 등가원리, 1912년의 실패, 그로스만과 함께 찾았다가 버린 수학이 처음으로 자연의 오래된 수수께끼와 연결되었다. 수성은 그에게 장방정식을 끝낼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수성은 이론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알려진 이상 현상을 새 이론이 설명한 경우였다. 강력한 성공이지만,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문제를 알고 답을 만든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었다.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두 경쟁값 가운데 하나를 골라 내는 더 위험한 시험이 필요했다. 그 시험은 아인슈타인이 오래전부터 하늘에 예약해 둔 것이었다.
2. 아인슈타인은 같은 빛을 두 번 예측했다
1911년 아인슈타인은 등가원리만으로 태양 곁의 빛이 약 0.83초각 휠 것이라고 계산하고 천문학자들에게 일식 때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재 이용할 수 있는 장비로 중력장이 빛의 전파에 미치는 영향을 검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 — 「중력이 빛의 전파에 미치는 영향」, 1911
그 예측에는 중력에 따른 시간 변화는 들어 있었지만 공간 곡률의 기여는 빠져 있었다. 1915년 장방정식을 완성한 뒤 다시 계산하자 값은 약 1.75초각으로 두 배가 되었다. 자기 이름을 알릴 첫 계산이 오히려 최종 이론이 틀렸다면 나와야 할 값과 거의 같아진 셈이었다.
이 차이 덕분에 일식은 단순히 ‘빛이 휘는가’를 묻는 실험이 아니게 되었다. 작은 값은 옛 설명과 양립할 수 있지만 큰 값은 시공간 곡률의 기여를 요구한다. 유리 건판 위에서 별의 위치를 비교하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이전 이론보다 나은지 수치로 가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예측은 1919년까지 아무도 시험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1914년 8월, 아인슈타인의 요청을 받은 천문학자 에르빈 프로인틀리히가 일식 촬영을 위해 크림반도로 갔다. 당시 아인슈타인이 내놓은 값은 아직 1911년의 작은 편향이었다. 만일 깨끗한 사진이 찍혔다면, 훗날 완성될 일반상대론과 맞지 않는 수치가 먼저 시험대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관측보다 전쟁이 먼저 시작되었다. 독일인 관측대는 러시아에서 억류되고 장비는 압수되었으며, 다른 관측대도 흐린 하늘에 막혔다. 첫 공개 시험은 빛의 편향이 아니라 인간 세계의 충돌 때문에 무산되었다. 역설적으로 그 실패가 아인슈타인에게 시간을 벌어 주었다. 이듬해 그는 공간 곡률까지 포함한 새 값 1.75초각을 얻었다.
계산이 완성된 1915년의 유럽에는 여전히 별빛보다 더 큰 장벽이 드리워져 있었다. 전쟁이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더 나은 망원경이 아니라, 끊긴 학술 네트워크를 다시 잇는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3. 전쟁으로 끊긴 길을 건너간 이론
일반상대론은 독일어로 발표되었고 영국과 독일은 전쟁 중이었다. 논문이 존재한다고 해서 영국의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중립국 네덜란드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접한 에딩턴은 이 난해한 이론을 영어권에 설명하기 시작했다. 1918년에는 특수상대론에서 장방정식과 관측 시험까지 한 흐름으로 묶은 보고서를 펴냈다.
아인슈타인에게 에딩턴은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었다. 방정식을 이해하고 다른 언어권으로 옮긴 해설자였으며, 곧 그 방정식을 자연 앞에 세울 관측자가 되었다. 퀘이커교도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에딩턴에게도 독일 과학자의 이론을 영국인이 공정하게 시험한다는 일은 과학 이상의 의미를 띠었다. 전쟁이 사람과 논문의 길을 끊었다면, 공동의 자연법칙을 확인하는 일은 그 길을 다시 잇는 행위가 될 수 있었다. 국경에 막혔던 방정식이 이번에는 달의 그림자를 따라 대륙을 건너게 된 것이다.
일식 때 태양은 히아데스 성단의 밝은 별들 앞을 지나갈 예정이었다. 평소 태양이 없는 밤이라면 쉽게 찍히는 별들이지만, 태양 곁에서는 밝은 하늘에 묻힌다. 달이 태양 원반을 완전히 가리는 몇 분 동안에만 별과 태양을 같은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천문학적으로는 드물 만큼 좋은 배치였다.
하지만 지구의 날씨는 장방정식처럼 계산되지 않았다. 한곳이 흐리면 수개월의 준비가 사라진다. 그래서 관측대는 프린시페와 브라질 소브랄 두 곳으로 나뉘었다. 프린시페에서는 에딩턴과 코팅엄이, 소브랄에서는 그리니치 천문대 팀이 서로 다른 장비로 같은 몇 분을 기다렸다. 두 관측지는 단순한 규모 확대가 아니라 실패 방식까지 분산하는 장치였다. 하나의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 두 대륙이 같은 태양을 바라보게 되었다.
4. 1919년 5월 29일 — 태양이 사라지기 전

아서 에딩턴(1882–1944) — 프린시페섬의 흐린 하늘 아래에서 별빛이 태양 곁에서 얼마나 휘는지 기록하려 했다.
프린시페의 일식 날 아침에는 폭우가 내렸다. 장비가 아무리 정밀해도 구름을 관통할 수는 없었다. 비는 정오 무렵 잦아들었지만 하늘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달이 태양 앞으로 다가오는 동안 에딩턴 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은 준비한 순서대로 건판을 갈아 끼우고, 구름 사이로 별빛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주위가 어두워지고 태양이 검은 원으로 바뀌었다. 완전한 어둠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구름은 흘렀다. 오늘날처럼 화면에서 사진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한 장을 노출하고 유리 건판을 빼낸 뒤 새 건판을 끼우는 일을 정해 둔 시간표대로 반복해야 했다. 별빛이 감광유제에 닿았는지는 현장에서 알 수 없었다. 에딩턴과 코팅엄은 보이지 않는 결과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수개월의 항해와 4년의 이론이 셔터 한 번, 구름 한 조각에 흔들렸다.
일식이 끝나자 낮은 다시 밝아졌지만 답은 밝아지지 않았다. 촬영한 열여섯 장 가운데 별의 위치를 실제 측정에 쓸 수 있는 판은 극히 적었다. 구름은 별의 수와 선명도를 빼앗았고, 남은 점이 측정에 충분한지는 현상과 비교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완전히 빈손은 아니었다. 몇 개의 희미한 별점이 남았다.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은 그 작은 점들 속에서 판독을 기다렸다.
소브랄에서는 하늘이 더 맑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주력 아스트로그래프는 낮의 열과 초점 변화 때문에 별상이 퍼지고 사진판의 축척도 달라졌다. 대신 보조 장비로 가져간 4인치 렌즈가 선명한 사진을 남겼다. 주연으로 데려간 망원경이 흔들리고 예비 선수가 결정적인 장면을 찍은 셈이다.
자연은 ‘성공’이나 ‘실패’라고 쓰인 봉투를 건네지 않았다. 구름 낀 건판, 초점이 흐트러진 건판, 비교적 선명한 건판을 섞어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 흔적에서 판결을 읽어야 했다.
5. 세 묶음의 건판, 세 개의 숫자
일식 사진 속 별의 위치만 보아서는 편향을 알 수 없다. 태양이 그 자리에 없을 때 같은 별들을 찍은 비교 사진과 대조해야 한다. 문제는 사진 두 장을 겹쳐 점이 움직였는지만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망원경의 초점이 조금 달라지면 판 전체의 축척이 바뀌고, 온도가 달라져도 별 사이 거리가 미세하게 변한다. 별상이 번지면 중심을 어디로 잡을지도 모호해진다. 태양을 중심으로 바깥쪽으로 벌어지는 이동과 장비 전체의 팽창·회전·왜곡을 수학적으로 분리해야 했다. 현장보다 분석실에서 더 길고 조용한 긴장이 시작되었다.
자료는 세 묶음이었다. 프린시페 건판은 약 1.61초각을 주었지만 오차가 컸다. 소브랄의 4인치 렌즈는 약 1.98초각으로 아인슈타인의 1.75초각에 가까웠다. 소브랄 아스트로그래프는 약 0.93초각을 냈지만 일식 중 초점 변화와 축척 문제로 신뢰하기 어려웠다.
세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 누구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아인슈타인 값에 가까웠고, 하나는 그 방향이지만 오차가 컸으며, 하나는 작은 편향 쪽에 가까웠다. 어느 숫자에 더 큰 신뢰를 줄지는 이론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각 장비가 실제로 안정적으로 작동했는가에 달려 있었다.
공식 보고서는 결함이 확인된 아스트로그래프 결과에 낮은 비중을 두고, 프린시페와 소브랄 4인치 자료가 아인슈타인의 예측을 지지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 선택을 두고 훗날 ‘원하는 자료만 골랐다’는 의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관측 당시 기록에는 아스트로그래프의 초점과 별상 변화가 남아 있고, 후대 재분석도 단순한 결과 맞추기라는 설명을 지지하지 않는다. 과학적 판단은 모든 숫자에 똑같은 무게를 주는 일이 아니라, 숫자가 만들어진 과정까지 보고 무게를 정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1919년 자료를 오늘날의 정밀 측정처럼 꾸밀 필요도 없다. 프린시페 자료는 적었고 오차는 컸으며, 세 자료군이 한목소리를 낸 것도 아니었다. 이 관측의 위대함은 의심할 여지 없는 마지막 소수점에 있지 않다. 대담한 이론이 경쟁하는 수치 예측을 내놓았고, 위험하고 불완전한 관측이 그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큰 편향 쪽을 지지했다는 데 있다.
결과가 정리되어 영국에서 공식 발표되기 전, 소식은 전쟁 뒤에도 직접 통신이 원활하지 않던 베를린으로 곧장 가지 못했다. 9월 22일 중립국 네덜란드의 로런츠가 보낸 전보가 아인슈타인에게 예비 소식을 전했다. 빛의 굴절이 확인된 듯하지만 값은 아직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는 신중한 내용이었다. 1915년에는 수성이 아인슈타인 혼자에게 확신을 주었다면, 1919년에는 다른 나라의 관측자들이 그의 계산을 독립적으로 읽고 있었다. 그는 자기 이론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알았지만, 세계의 공개 판정은 아직 남아 있었다.
6. 11월 6일 — 발표장의 정적이 신문 지면의 폭발로 바뀌다
1919년 11월 6일, 런던에서 왕립학회와 왕립천문학회의 합동 회의가 열렸다. 벽에는 과학사의 긴 계보가 걸려 있었고, 그 중심에는 뉴턴의 초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영국의 관측자들이 독일 과학자의 이론이 뉴턴의 중력을 넘어서는 값을 맞혔다고 보고하려 했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발표의 핵심은 짧았다. 태양 가까이에서 빛이 휘었고, 그 크기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요구하는 값과 일치했다. 회의장에 있던 이들은 숫자의 오차와 장비 상태를 물을 수 있었지만, 그 결론의 규모도 알아보았다. 빛조차 태양 주변의 기하를 따른다면 중력은 물체 사이의 힘에 그치지 않는다. 제7장에서 아인슈타인이 방정식으로 바꾼 공간과 시간이 실제 별빛의 위치를 옮긴 것이다. 그 한 문장이 나오기까지에는 두 대륙의 하늘, 구름과 열, 세 종류의 건판, 수개월의 비교 측정이 쌓여 있었다.
회의장의 신중한 문장은 문 밖을 나가자 전혀 다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영국 신문은 ‘과학의 혁명’, ‘우주의 새로운 이론’, ‘뉴턴의 관념이 뒤집히다’라는 이야기로 결과를 전했다. 대서양 건너 신문은 하늘의 빛이 모두 비뚤어졌다는 식의 거대한 제목을 뽑았다. 텐서방정식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200년 넘게 우주를 지배한 뉴턴의 세계가 흔들렸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전날까지 전문 물리학자들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은 갑자기 세계적인 이름이 되었다. 기자들은 베를린의 학자에게 몰려들었고, 대중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 자체를 천재성의 증거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뉴턴을 넘어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작 그가 8년 동안 한 일은 뉴턴을 조롱하거나 폐기한 것이 아니라 뉴턴 이론이 성공한 영역을 보존하면서 그 경계를 넓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문 지면에는 ‘약한 장의 근사’보다 ‘우주의 혁명’이 훨씬 잘 어울렸다. 세계가 먼저 이해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혁명의 줄거리였다.
아인슈타인에게도 이 순간은 단순한 명성의 탄생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이론을 영국인이 시험했고, 전쟁 직후의 런던 학회가 승인했다. 1914년에는 전쟁이 그의 첫 관측 시도를 멈추었지만, 1919년에는 적국이던 나라의 과학자들이 그 검증을 완성했다. 자연의 판정은 국적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의 열광이 커질수록 과학은 다시 차분한 질문으로 돌아가야 했다. 별빛 편향이 맞았다고 중력적 시간 변화까지 자동으로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한 건판의 오차가 다른 실험의 오차를 대신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일식 하나가 상대성이론 전체를 영원히 증명한 것인가? 답은 아니었다. 바로 그래서 열광 다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7. 열광 다음 날, 아직 움직이지 않은 스펙트럼선
일반상대론의 고전적 시험은 서로 다른 종류의 증거였다. 수성은 오래된 궤도 이상을 설명한 경우였고, 별빛 편향은 구체적인 수치 예측을 일식이 시험한 경우였다. 중력적 적색편이는 당시 아직 깨끗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태양 대기의 운동과 압력, 대류 효과가 미세한 스펙트럼선 이동과 섞였기 때문이다.
에딩턴도 1920년 보고서에서 빛의 편향을 큰 진전으로 평가하면서 적색편이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1921년 《Nature》 특집이 상대성이론에 관한 폭발적인 관심을 보여 주었을 때에도 관련 논문은 적색편이 증거가 서로 충돌한다고 기록했다.
이 대목은 열광을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의 힘을 보여 준다. 신문은 하루 만에 혁명을 선언할 수 있지만 자연은 예측마다 별도의 증거를 요구한다.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서 함께 나온 결과라도 서로 다른 장비와 오차를 거쳐 따로 시험받아야 했다. 1919년이 이론을 세계의 중심에 세웠다면, 미결 상태의 적색편이는 그 중심에 선 이론에게 다음 시험을 요구했다.
8. 하버드의 탑에서 빛을 몇 조각 움직이다
적색편이는 1919년의 미결 문제로 남았지만 영원히 태양만 바라볼 필요는 없었다. 태양 대기가 방해한다면 대기를 걷어 낼 수 있는 지상 실험을 만들면 된다. 1959년 하버드 대학의 제퍼슨 연구소에서 로버트 파운드와 글렌 레브카는 탑의 위아래 사이로 감마선을 보냈다. 높이 차이는 우주적 규모와 거리가 멀었고 예상되는 주파수 변화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작았다. 대신 실험자는 온도와 운동을 통제하고 같은 과정을 반복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용한 뫼스바우어 효과는 아주 미세한 에너지 차이를 감지하게 해 주었다. 중력장 아래쪽과 위쪽에서 빛의 주파수가 달라진다는 결과가 지상의 건물 안에서 측정되었다. 1919년에는 태양 대기의 소음에 묻혔던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이제 통제된 실험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약한 중력장에서는 그 관계를 다음처럼 쓸 수 있다.
Δf/f ≈ ΔΦ/c²
식의 핵심은 빛이 여행하며 피로해진다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높이의 시계가 서로 다른 속도로 간다는 것이다. 오늘날 원자시계와 위성항법의 시간 보정은 제6장의 엘리베이터에서 태어난 생각이 일상 기술의 조건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인물 이야기 보기 로버트 파운드의 이야기 → 글렌 레브카의 이야기 →
9. 메아리와 자이로스코프가 같은 방정식으로 돌아오다
검증은 더 멀리 뻗었다. 1964년 어윈 샤피로는 금성이나 수성을 향해 보낸 레이더 신호가 태양 가까이를 왕복하면 평평한 시공간에서보다 조금 늦게 돌아와야 한다고 제안했다. 빛은 국소적으로 언제나 c로 움직이지만 태양 주변의 기하가 경로와 시간을 바꾼다. 행성에서 돌아온 희미한 전파 메아리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을 또 다른 방식으로 시험했다.
인물 이야기 보기 어윈 샤피로의 이야기 →
지구 궤도에서는 Gravity Probe B의 자이로스코프가 방향을 지키려 했다. 완벽하게 고요히 버티는 축이 지구가 만든 곡률과 회전에 따라 아주 조금 달라지는지를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기술적 잡음과 긴 분석을 거친 결과는 일반상대론의 예측과 일치했다.
수성의 궤도, 별빛의 위치, 탑을 오르는 감마선, 행성에서 돌아오는 전파, 궤도의 자이로스코프는 겉보기에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각각은 먼저 자기만의 문제를 가진 짧은 이야기다. 수성은 설명되지 않는 궤도 차이를, 일식은 구름과 건판을, 탑은 너무 작은 주파수 변화를, 레이더는 태양 곁의 왕복시간을, 자이로스코프는 잡음보다 작은 축의 변화를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모두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으로 돌아온다. 하나의 장비가 같은 실수를 반복해 얻은 일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현상과 서로 다른 실패 가능성이 같은 시공간 기하로 수렴한 것이다. 이것이 한 번의 화려한 승리보다 누적된 검증이 더 강한 이유다.
10. 아인슈타인이 관측 가능성을 잘못 본 경우
1936년 루돌프 만들의 부탁으로 아인슈타인은 앞쪽 별의 중력이 뒤쪽 별빛을 휘게 하는 경우를 계산했다. 정확히 정렬되면 배경 별은 앞쪽 별을 두른 고리로 보인다.
“편향 법칙으로부터, 중심선의 연장선 위에 정확히 놓인 관측자는 점 모양의 별 A 대신, B의 중심을 두르는 각반지름 β의 빛나는 고리를 보게 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 「별의 중력장에 의한 빛의 렌즈와 같은 작용」, 1936
그러나 항성끼리의 정렬과 당시 망원경의 성능을 생각한 그는 결론을 덧붙였다.
“그러므로 이 현상을 관측할 가망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론은 옳았지만 전망은 너무 조심스러웠다. 은하와 은하단의 큰 질량, 멀고 밝은 광원, 현대 관측기술은 ‘거의 볼 수 없다’던 현상을 아인슈타인 고리와 다중상, 미세중력렌즈로 바꾸었다. 이 에피소드는 아인슈타인을 더 인간적으로 만든다. 그는 자연법칙을 정확히 읽고도 자연이 그 효과를 얼마나 풍부하게 전시할지는 다 내다보지 못했다.
11. 검증은 승리의 도장이 아니라 살아남은 역사다
1919년 일식은 역사적으로 결정적이었지만 상대성이론 전체를 단번에 완전히 증명하지는 않았다. 당시 건판의 불확실성은 컸고 적색편이는 미결이었다. 그렇다고 일식 관측이 의미 없는 홍보 행사였던 것도 아니다. 경쟁하는 수치 예측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값을 지지했고, 이후 더 정밀하고 독립적인 관측들이 같은 방향으로 쌓였다.
과학에서 검증은 ‘영원히 참’이라는 도장을 찍는 일이 아니다. 이론이 위험을 감수하고 구체적인 값을 내놓게 한 뒤, 서로 다른 방법으로 틀릴 기회를 계속 주는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수성에서 틀릴 수 있었고, 일식 건판에서 틀릴 수 있었으며, 탑과 레이더와 자이로스코프에서도 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험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같은 방정식으로 되돌아왔다.
1915년 장방정식은 아인슈타인 개인의 성취였다. 1919년의 구름과 건판, 그 뒤의 수십 년에 걸친 실험은 그것을 공동의 지식으로 바꾸었다. 일식 날 잠시 열린 구름 사이로 보인 것은 별 몇 개뿐이었다. 하지만 그 희미한 점들을 따라 인류가 공간과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성·빛·기하학 — 검증을 향한 원전 모아보기
다음 장으로 — 세계가 묻자 아인슈타인이 직접 답하다
일식 뒤 세계는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외웠지만 그의 이론을 이해한 사람은 드물었다. 신문은 뉴턴의 우주가 무너졌다고 선언했고, 독자들은 도대체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했는지 물었다.
그래서 본편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이어지는 인터미션에서 1919년의 아인슈타인이 직접 독자 앞에 나선다. 기자와 편집자가 줄이려 애썼던 그 난해한 이론을, 그는 기차와 자와 시계의 말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장의 인물
아서 에딩턴 P16
1882–1944
1919년 5월 29일 개기일식 관측 보고 (다이슨·에딩턴·데이비드슨, 1920)
제1차 세계대전 중 영어권에 일반상대성이론을 전파하고, 1919년 일식 원정 관측으로 빛이 태양 중력에 의해 휘는 정도를 측정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이론과 다투던 두 가지 예측값 중 아인슈타인의 손을 들어 준 관측 결과를 세계에 공표했다.
아인슈타인 원전 —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한 수성 근일점 운동의 설명 D12c
르베리에가 19세기에 발견한 수성 근일점 이동의 미해결 잔차를 새 이론으로 설명한 논문.
수식 심화
태양 옆을 지나는 별빛은 얼마나 휘어지는가?
$$ \delta = \frac{4GM}{c^2 b} $$
δ — 빛이 휘는 각도 / G — 중력상수 / M — 태양의 질량 / c — 광속 / b — 별빛이 태양 중심에서 스쳐 지나가는 최근접 거리
뉴턴 역학으로 빛을 입자처럼 계산하면 이 값의 절반(1911년 아인슈타인의 첫 계산)만 나온다. 1915년 완성된 일반상대론은 공간 자체의 휘어짐까지 더해 정확히 두 배(태양 가장자리 기준 약 1.75″)를 예측했고, 1919년 에딩턴의 일식 관측이 이 두 배 값을 확인했다.
적용 한계 — 이 식은 태양 정도의 약한 중력장에서 성립하는 근사값이다. 블랙홀처럼 극단적인 중력장 근처에서는 빛이 아예 갇히는 등 이 선형 근사를 넘어서는 효과가 나타난다.
실험·관측
당대·후대의 반응
이 장의 계보
로버트 파운드(지도교수) → 글렌 레브카(대학원생, 1959년 파운드–레브카 실험 공동 수행)
아서 에딩턴의 1919년 일식 관측과 함께, 이 장의 실험들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서로 다른 정밀도로 시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