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상대성이론 이전

제1장 — 뉴턴의 절대시간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예상 읽기 시간 약 15분

너무 성공적이어서 보이지 않았던 틈

뉴턴의 역학은 사과의 낙하와 달의 공전을 같은 법칙으로 설명했다. 《프린키피아》가 세운 세계에서 공간은 모든 운동이 벌어지는 고정 무대이고 시간은 우주 어디서나 같은 속도로 흐른다. 이 체계는 200년 넘게 행성의 위치를 예측하고 기계를 설계할 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전기와 자기를 다루는 새로운 물리학이 이 무대 자체에 조용히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상대성이론은 이 성공을 부정하며 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뉴턴 이론이 어디까지 정확하며, 빛과 전자기장을 만나면 왜 더 넓은 틀이 필요한지를 물었다.

이 균열은 한 사람이 단숨에 낸 것이 아니었다. 갈릴레이와 뉴턴은 운동을 설명할 무대를 세웠고,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그 무대가 장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였으며, 마이컬슨과 몰리는 빛의 매질을 찾으려다 예상한 신호를 얻지 못했다. 로런츠와 푸앵카레는 기존 무대를 지키면서도 관측과 맞는 수학을 만들었고, 리만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간 자체가 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길을 열었다. 서로 알지 못한 채 이어진 이 길들은 마침내 아인슈타인의 책상 위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자연법칙은 같은데 설명만 달라진다면, 고쳐야 할 것은 자연일까, 아니면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재는 방식일까.

1. 갈릴레이의 배

갈릴레오 갈릴레이 초상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 움직이는 배 안에서도 같은 역학이 성립한다는 생각으로 상대성의 첫 무대를 세웠다.

163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서 등장인물 살비아티의 입을 빌려 유명한 사고실험을 제시했다. 잔잔한 바다를 일정한 속도로 가는 배의 밀폐된 선실에서 공을 떨어뜨리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과 나비가 나는 모습을 관찰해도, 배가 정지했는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배는 지동설을 옹호하려는 갈릴레이의 무기였다 — 지구가 태양 둘레를 빠르게 돌고 있다면 왜 우리는 그 운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가라는, 당대 지동설 반대자들의 가장 강력한 반박에 대한 답이었다. 이 대화록으로 갈릴레이는 이듬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가택연금형을 선고받았지만, 그가 세운 원리 자체는 살아남았다.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관성계에서는 역학 법칙이 똑같이 성립한다 — 이것이 갈릴레이 상대성의 핵심이다.

두 관성계의 위치 관계를 x'=x-vt로 바꾸되 시간은 t'=t로 둔다. 속도는 단순히 더하고 빼며 가속도는 두 계에서 같다. 뉴턴의 운동법칙은 이 변환 아래 같은 형태를 유지한다.

2.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아이작 뉴턴 초상

아이작 뉴턴(1642–1727) — 운동과 중력을 하나의 수학적 체계로 묶어 근대 물리학의 기준점을 세웠다.

에른스트 마흐 초상

에른스트 마흐(1838–1916) — 절대공간을 비판하며 관성과 우주 전체의 관계를 다시 묻게 했다.

서재에서 프린키피아를 집필하는 아이작 뉴턴

뉴턴의 성공은 이후 모든 논쟁이 출발할 단단한 무대를 만들었다.

뉴턴은 상대적인 위치와 운동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가 든 예는 소박했다. 물을 채운 통을 밧줄에 매달아 빙빙 돌린다. 처음 순간에는 통만 돌고 물은 아직 가만히 있어 수면이 평평하다. 잠시 뒤 물도 통을 따라 함께 돌기 시작하면, 수면은 가장자리부터 오목하게 파인다. 그런데 이 두 순간 모두 '물과 통 사이의 상대적인 회전 속도'는 똑같다 — 처음엔 통만 빠르고 물은 느리며, 나중엔 둘 다 같은 속도로 돈다는 점에서 상대 운동의 크기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수면의 모양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뉴턴은 물이 '무엇에 대해' 실제로 도는가, 곧 절대공간에 대한 진짜 회전 여부라고 답했다. 회전하는 물통의 수면이 오목해지는 현상처럼, 가속 운동은 단순한 상대속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그는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이 운동의 기준으로 삼았다. 1687년 『프린키피아』의 정의(定義) 뒤에 붙인 스콜리움에서 그는 이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절대적이고 참되며 수학적인 시간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신의 본성에 따라, 외부의 그 무엇과도 관계없이 한결같이 흐른다. … 절대공간은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외부의 그 무엇과도 무관하게, 언제나 똑같고 움직이지 않는 채로 남아 있다."

절대시간은 시계가 없어도 우주 어디서나 똑같이 흐르고, 절대공간은 그 안에 아무것도 없어도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는 직접 보이는 물체가 아니라 이론의 바탕이다. 마흐는 관성이 우주 전체 물질과의 관계에서 생길 가능성을 제기하며 절대공간 개념을 비판했다. 이 비판은 아인슈타인에게 중요한 자극이 되었지만 일반상대론이 마흐의 생각을 완전히 실현한 것은 아니다.

3. 힘에서 장으로

뉴턴 중력은 떨어진 두 물체 사이의 작용을 수학적으로 정확히 기술했지만, 그 작용이 공간을 가로질러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이 침묵은 뉴턴 자신을 가장 불편하게 만든 지점이기도 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1920년 라이덴 대학 강연 「에테르와 상대성이론」에서 이 불편함을 이렇게 되짚었다.

"중력에 최초로 원인을 부여한 것은 뉴턴의 중력이론으로, 그는 이를 질량에서 비롯되는 원격작용으로 해석했다. 뉴턴의 이론은 아마도 자연현상의 인과연쇄를 향한 노력에서 이제까지 내디딘 가장 위대한 걸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론은 뉴턴 당대 사람들에게 상당한 불편함을 불러일으켰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나머지 경험으로부터 솟아나는 원리, 곧 상호작용은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즉각적인 원격작용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원리와 충돌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기와 자기를 접촉 없는 힘이 아니라 공간을 채운 '장(場)'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열네 살에 런던의 한 제본소에 도제로 들어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매다는 책들 틈에서 제인 마르셋의 『화학에 관한 대화』를 탐독하고 청년 철학회 강연을 쫓아다니며 혼자 공부했다. 스무 살이던 1812년, 지인에게서 얻은 표를 들고 험프리 데이비의 왕립연구소 강연을 들으러 갔고 그 내용을 300쪽짜리 노트로 정리해 데이비에게 보냈다. 이듬해 데이비는 그를 조수로 채용했고, 이후 그는 평생 왕립연구소 실험실에 머물며 철가루가 자석 주위에 그리는 무늬 같은 눈에 보이는 패턴으로 세계를 그렸다. 공간의 각 지점에 물리량을 부여하고, 그 변화가 유한한 속도로 퍼져 나간다는 생각이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정통 수학 훈련을 받은 스코틀랜드 지주 가문 출신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이 도제 출신 실험가의 그림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주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전기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 나는 그 주제에 관한 수학책을 읽지 않고 패러데이의 『전기학 실험 연구』부터 먼저 다 읽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의 결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패러데이의 생각이라고 여긴 것을 수학적 형태로 옮겨 보았을 때, 나는 대체로 두 방법의 결과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패러데이는 마음의 눈으로 온 공간을 가로지르는 힘의 선을 보았지만, 수학자들은 멀리서 끌어당기는 힘의 중심을 보았다."

맥스웰은 1865년 논문 「전자기장의 동역학적 이론」에서 이 번역을 완결된 수학으로 마무리했다. 제본소의 도제가 실험대 위에서 손으로 그려낸 장의 그림과, 케임브리지에서 훈련된 수학자의 방정식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자연을 가리키고 있었다. 패러데이의 장 개념에 변위전류라는 항을 더해 완성한 방정식들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를 낳으며 공간을 퍼져 나가는 파동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 파동의 속도를 계산하자 당시 측정되어 있던 빛의 속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맥스웰은 이로부터 빛 자체가 전자기 현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 광학과 전자기학이라는 별개의 두 학문이 하나로 합쳐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맥스웰 방정식은 하나의 일정한 파동 속도를 품고 있었고, 갈릴레이식 속도합성을 적용하면 관측자마다 방정식의 형태가 달라지는 문제가 생겼다. 뉴턴 역학이 모든 관성계에서 똑같이 성립하는 것과 달리,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마치 하나의 특별한 좌표계에서만 참인 것처럼 보였다.

4. 에테르라는 답

앨버트 마이컬슨 초상

앨버트 마이컬슨(1852–1931) — 빛의 속도와 에테르 바람을 극도의 정밀도로 측정하려 했다.

에드워드 몰리 초상

에드워드 몰리(1838–1923) — 화학자의 정밀 계측 경험을 마이컬슨의 간섭계 실험에 더했다.

소리가 공기를, 물결이 물을 필요로 하듯 빛도 매질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물리학자들은 우주를 채운 '발광 에테르'를 상정하고, 맥스웰의 빛 속도는 에테르에 대한 속도라고 보았다. 빛이 편광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 에테르는 유체가 아니라 고체에 가까운 성질을 지녀야 한다는 결론까지 따라 나왔다 — 횡파는 고체에서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물리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거의 견고한 '준강체적' 에테르라는, 다루기 까다로운 개념에 이르렀다.

지구가 이 에테르 속을 지나간다면, 진행 방향에 따라 빛의 왕복 시간이 미세하게 달라져야 한다. 1887년 앨버트 마이컬슨과 에드워드 몰리는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의 케이스 응용과학학교 지하실에서, 서로 직각으로 놓은 두 개의 빛줄기를 간섭시켜 이 미세한 차이를 찾는 실험을 했다. 장비는 수은 위에 띄운 석판 위에서 자유롭게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지구 공전에 따른 에테르 바람의 방향이 어느 쪽이든 감지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논문 「지구와 발광 에테르의 상대운동에 관하여」에서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실제로 관측된 변위는 확실히 예상값의 20분의 1보다 작았으며, 아마도 40분의 1보다도 작았다. … 지구와 발광 에테르의 상대운동으로 말미암은 변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간섭무늬 사이 거리의 100분의 1을 크게 넘지 못한다."

기대했던 신호의 40분의 1도 채 안 되는 이 결과는 당대 물리학자들에게 깊은 당혹감을 안겼다. 다만 이 결과를 '에테르가 없음을 단번에 증명했다'고 쓰면 지나치다. 마이컬슨과 몰리 자신을 포함해 여러 물리학자가 장치의 민감도와 다양한 에테르 모형(에테르가 지구에 끌려간다는 가설 등)을 두고 논의를 이어갔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1905년 사고에 이 실험이 어느 정도 직접 영향을 주었는지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 그의 1905년 논문은 이 실험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에테르라는 개념 자체가 안고 있던 이론적 곤란은 따로 있었다. 맥스웰과 그의 후계자 하인리히 헤르츠는 에테르가 전자기장을 실어 나르는 역학적 매질이라고 여겼지만, 그 역학적 성질을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모형을 끝내 만들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같은 1920년 강연에서 이 막다른 골목과 로런츠가 낸 출구를 이렇게 정리했다.

"헤르츠의 이론은 물질과 에테르에 각각 서로 아무런 상상 가능한 관계도 맺지 않는 역학적 상태와 전기적 상태를 부여했다는 결함만이 아니라, 움직이는 유체 속에서 빛이 전파되는 속도에 관한 페르(피조)의 중요한 실험 결과, 그리고 그 밖의 확립된 실험 결과들과도 어긋난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할 때 H. A. 로런츠가 등장했다. 그는 이론적 원리들을 훌륭하게 단순화함으로써 이론을 경험과 조화시켰다. 그는 에테르에서는 그 역학적 성질을, 물질에서는 그 전자기적 성질을 제거함으로써, 맥스웰 이래 전기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5. 로런츠와 푸앵카레

헨드릭 로런츠는 물질을 이루는 하전 입자와 텅 빈 공간을 채운 에테르를 분리하고, 오직 에테르만이 전자기장의 자리라고 봄으로써 이론을 크게 단순화했다. 나아가 그는 움직이는 물체가 운동 방향으로 미세하게 수축하고(1892년, 조지 피츠제럴드가 독립적으로 제안한 것과 같은 생각이었다), 계 안의 '국소시간'이라는 보조 변수를 도입해야 마이컬슨-몰리 실험을 포함한 여러 관측이 맥스웰 방정식과 들어맞는다는 것을 보였다. 1904년 논문 「빛보다 작은 임의의 속도로 움직이는 계에서의 전자기 현상」에서 그는 오늘날 로런츠 변환이라 불리는 식들의 성숙한 형태를 제시했다.

앙리 푸앵카레는 이 성과에 물리학적·철학적 의미를 더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강연에서 그는 자연법칙이 정지한 관측자에게든 등속운동하는 관측자에게든 똑같이 성립해야 한다는 원리를 뚜렷이 표명하며, 이를 가리켜 '상대성의 원리'라 불렀다. 이듬해인 1905년, 논문 「전자의 역학에 관하여」에서 그는 로런츠의 변환식들이 회전과 더불어 수학적으로 하나의 군(群)을 이룬다는 것을 증명하고, 이 변환에 로런츠의 이름을 붙였다(오늘날 쓰이는 '로런츠 변환'이라는 이름 자체가 푸앵카레의 명명이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이 1905년 6월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핵심 수식은 상당 부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수식을 쓴다고 같은 이론은 아니다. 로런츠와 푸앵카레의 설명에서는 에테르와, 그 에테르에 대해서만 ‘참된’ 것으로 여겨지는 절대시간이 배경에 남았다. 국소시간은 어디까지나 계산을 돕는 보조 개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반대로 어떤 관성계도 특권적이지 않으며, 측정 가능한 시계의 시간 밖에 숨은 절대시간을 둘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차이는 수식의 소유권보다 공간과 시간의 물리적 의미에 있었다. 세 사람은 같은 문제 앞에 있었지만 그것을 푸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선택을 했다.

6. 리만의 또 다른 길

베른하르트 리만 초상

베른하르트 리만(1826–1866) — 공간 자체가 휠 수 있는 기하학을 열어 훗날 일반상대성이론의 언어가 되게 했다.

한편 1854년, 스물일곱 살의 베른하르트 리만은 괴팅겐 대학의 교수 자격 취득 강연에서 「기하학의 기초에 놓인 가설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공간의 기하가 반드시 유클리드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였다. 거리를 재는 규칙(계량)은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곡률은 그 공간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공간 내부의 측정만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강연의 맺음말에서 리만은 놀랍도록 앞선 직관을 내비쳤다.

"그러므로 공간의 바탕에 놓인 실재는 이산적인 다양체를 이루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는 그 계량적 관계의 근거를 공간 바깥에서, 곧 공간에 작용하는 결합하는 힘들에서 찾아야 한다."

공간의 기하 자체가 물리적인 '힘'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이 문장은, 반세기 뒤 아인슈타인과 그로스만이 중력을 시공간의 곡률로 표현하면서 비로소 물리학의 언어가 된다. 1854년의 리만은 중력이론을 만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미래의 물리학이 건너갈 다리를 놓은 뒤, 그 다리의 목적지를 보지 못한 채 물러난 셈이었다. 전자기학의 위기가 1905년 특수상대론으로 향하는 길이었다면, 리만기하학은 1915년 일반상대론으로 향하는 두 번째 길이었다. 두 길을 한 이론 안에서 만나게 할 사람은 아직 스위스 특허청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아인슈타인 원전 번역 펼쳐보기 — 1907년 「상대성원리와 그로부터 이끌어낸 결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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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과 함께 읽기 — 1907년 「상대성원리와 그로부터 이끌어낸 결론들」

'마이컬슨-몰리 실험 하나가 특수상대성이론을 낳았다'는 통념은 아인슈타인 자신의 말과도 어긋난다. 1905년 논문은 이 실험을 이름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2년 뒤인 1907년에 발표한 총설 논문 「상대성원리와 그로부터 이끌어낸 결론들」의 첫머리에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를 도입하며 이렇게 적는다.

"이 물음에 관해 우리는, 미켈슨과 몰리의 실험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가정을 세운다. 곧, 자연법칙은 기준계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다 — 적어도 그 기준계가 가속되어 있지 않은 한. 이 가정을 우리는 '상대성원리'라 부르며, 위에서 제시한 빛의 속도 불변의 원리와 더불어 이 뒤로 우리 논의의 토대로 삼기로 한다."

여기서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상대성원리를 '증명'하는 단 하나의 근거가 아니라, 그 원리를 '뒷받침하는' 여러 정황 가운데 하나로 인용된다. 아인슈타인에게 이 실험은 결정적 단서라기보다, 그가 이미 다른 경로로 다가가고 있던 원리와 들어맞는 실험적 정황 중 하나였다. 상대성이론의 출발점을 하나의 실험으로 좁히는 것은,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 자신이 그은 선보다 더 좁은 선이다.

아인슈타인에게 모인 세 갈래 길

인터랙티브 시각자료 — 뉴턴에서 특수상대성이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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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와 뉴턴에게서 시작한 첫 번째 길은 ‘누가 움직이고 있는가’를 물었다. 패러데이와 맥스웰, 마이컬슨과 몰리, 로런츠와 푸앵카레가 걸은 두 번째 길은 ‘빛과 전자기장은 어느 무대에서 움직이는가’를 물었다. 리만과 마흐가 연 세 번째 길은 더 근본적이었다. ‘그 무대 자체를 절대적이라고 믿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각 인물은 자기 시대의 문제를 풀었지만 다음 시대에 넘겨줄 과제도 함께 남겼다. 갈릴레이의 상대성은 빛을 품지 못했고, 뉴턴의 중력은 작용이 전달되는 과정을 말하지 못했다. 맥스웰의 빛은 일정한 속도를 요구했지만 그 속도의 기준은 불분명했고, 로런츠와 푸앵카레의 정교한 수학 뒤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에테르와 ‘참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리만의 휘어진 공간은 아직 물리학의 힘과 만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역할은 이 사람들의 이름 뒤에 자기 이름을 하나 더 보태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이던 미완성들을 측정 가능한 자와 시계라는 한곳으로 끌어당겼다. 에테르에 숨은 절대시간을 버리고 모든 관성계의 시간을 실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으로 받아들이자, 준비되어 있던 수식은 새로운 세계관이 되었다. 그리고 훗날에는 리만의 기하를 끌어와 무대 자체를 중력의 주인공으로 만들게 된다.

다음 장으로 — 빛의 속도는 왜 변하지 않는가

1905년 직전의 물리학에는 두 가지 선택처럼 보이는 것이 남았다. 상대성원리를 지키면 빛의 속도가 관측자마다 달라지고, 빛의 속도를 지키면 특정 에테르 좌표계를 인정해야 했다. 그해 6월, 아인슈타인은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의 첫 문장에서 바로 이 긴장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현재 시점에서 구상되는 맥스웰의 전기역학을 운동하는 물체에 적용하려고 하면, 관측된 현상과 일치하지 않는 비대칭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자석과 도체 사이의 상호 작용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 관측되는 현상은 오직 도체와 자석의 상대 운동에만 의존하지만, 통상적인 개념에 따르면 둘 중 어느 쪽이 운동하고 있는지에 따라 구별이 지어져야 한다."

같은 상대 운동인데 '누가 움직이는가'에 따라 설명이 달라진다는 이 비대칭이야말로, 다음 장이 마주하는 출발점이다. 아인슈타인은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았다. 대신 모든 관성계에서 물리 법칙과 빛의 속도가 함께 같다고 놓고, 공간과 시간의 측정법 자체를 바꾸었다.

이 장의 인물

갈릴레오 갈릴레이 초상

갈릴레오 갈릴레이 P01

1564–1642

「두 가지 주요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1632)

낙하와 관성의 사고실험으로 운동을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상대적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처음 보여 주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등속으로 움직이는 배 안에서는 어떤 역학 실험으로도 정지와 운동을 구분할 수 없다는 상대성의 원형을 남겼다.

아이작 뉴턴 초상

아이작 뉴턴 P02

1642–1727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무대로 삼아 운동법칙과 만유인력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그가 세운 절대적 시공간의 무대는 이후 두 세기 동안 물리학의 기준이 되었고, 그 무대 자체를 아인슈타인이 다시 묻게 될 질문으로 남겨 두었다.

베른하르트 리만 초상

베른하르트 리만 P04

1826–1866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에 관하여」(1854년 강연, 1868년 출판)

평평하지 않은, 곡률을 지닌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일반적인 기하학의 틀을 마련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반세기 뒤 그로스만을 거쳐 아인슈타인에게 전달될 중력의 기하학적 언어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에른스트 마흐 초상

에른스트 마흐 P05

1838–1916

「역학의 발달」(1883)

뉴턴의 절대공간 개념을 비판하고, 관성이 우주 속 다른 물질과의 관계에서 비롯한다는 관계론적 해석을 제시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절대공간이라는 무대 없이도 관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물음을 아인슈타인에게 넘겨 등가원리로 가는 길을 열었다.

앨버트 마이컬슨 초상

앨버트 마이컬슨 P06

1852–1931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상대운동에 관하여」(몰리와 공동, 1887)

정밀 간섭계로 지구가 에테르 속을 지나며 생겨야 할 빛의 속도 차이를 찾으려 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예상된 차이를 끝내 찾지 못한 실험 결과를 남겨, 에테르 가설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에드워드 몰리 초상

에드워드 몰리 P07

1838–1923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상대운동에 관하여」(마이컬슨과 공동, 1887)

마이컬슨과 함께 당대 최고 정밀도의 간섭계 실험을 수행해 에테르 바람의 흔적을 찾았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실험이 던진 침묵—빛의 속도가 지구의 운동과 무관해 보인다는 결과—을 다음 세대가 풀어야 할 문제로 남겼다.

아인슈타인 원전 — 상대성원리와 그로부터 이끌어낸 결론들 D08

Über das Relativitätsprinzip und die aus demselben gezogenen Folgerungen · 1907 · Jahrbuch der Radioaktivität und Elektronik 제4권(1907), 411–462쪽

특수상대성이론 전체를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재구성해 제시한 총설 논문.

원문·번역 전체 읽기 →

수식 심화

뉴턴의 세계에서 서로 다른 관성계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 x' = x - vt, \quad t' = t $$

x, t — 정지한 관찰자가 잰 위치와 시간 / x′, t′ — 속도 v로 움직이는 관찰자가 잰 위치와 시간

뉴턴의 세계에서 공간 좌표는 운동에 따라 바뀌지만 시간 t′=t는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같다고 가정한다. 이 갈릴레이 변환이 뉴턴 역학의 토대다.

적용 한계 — 빛의 속도에 가까운 운동에서는 이 변환이 실험과 어긋난다 — 2장에서 로런츠 변환으로 대체된다.

실험·관측

이 장의 계보

갈릴레오 갈릴레이(관성) → 아이작 뉴턴(절대공간·절대시간) · 마이컬슨–몰리(1887년 에테르 실험) · 헨드릭 로런츠 → 앙리 푸앵카레(변환의 군 구조) — 세 갈래가 2장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모인다

이 장은 하나의 인과 사슬이 아니라, 관성·에테르 실험·변환 수학이라는 세 개의 독립된 문제가 다음 장에서 합류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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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

제2장 — 빛의 속도는 왜 변하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