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 “기하학과 경험” |
원제: Geometrie und Erfahrung (확장판) 저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출처: 1921년 1월 27일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Berlin) 정기 강연의 확장판. Berlin: Julius Springer, 1921. 번역 범위: 전문 번역
이 글은 아인슈타인이 1921년 1월 27일 베를린의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에서 행한 강연 “기하학과 경험”을, 강연 직후 같은 해에 슈프링거(Springer)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낸 확장판(“erweiterte Fassung”)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철학적·인식론적 토대 — 공리기하학과 실천기하학의 구별, 강체·측정봉·시계라는 물리적 대상과 기하학적 개념의 관계, 그리고 우주가 유한하지만 무경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직관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가 — 를 대중 강연의 형식으로 풀어낸 아인슈타인 자신의 대표적인 글 가운데 하나이다. 훗날 그의 에세이집에도 여러 차례 재수록되었다.
출처 확인 및 번역 방법에 관하여. 이번 번역은 두 개의 원자료를 대조하여 진행했다.
첫째, 독일어 원문(자료번호 3-05)은 미시간 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을 스캔한 구글 북스 파일로, 표제지에 “GEOMETRIE UND ERFAHRUNG / ERWEITERTE FASSUNG DES FESTVORTRAGES GEHALTEN AN DER PREUSS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BERLIN AM 27. JANUAR 1921 / VON ALBERT EINSTEIN / BERLIN VERLAG VON JULIUS SPRINGER 1921”이라고 명시되어 있어 진본임을 확인했다. 다만 이 스캔본은 서지사항상 원래 20쪽 분량의 소책자인데, 실제로 남아 있는 본문은 인쇄 쪽번호 2쪽부터 16쪽까지이며, 16쪽이 “여기서 독자의 직관이 반발하는 지점에 이른다. ‘이런 것은 생각할 수 없다…’(‘Dies kann…’)”는 문장 중간에서 끊긴 채 곧바로 슈프링거 출판사의 광고 페이지로 넘어간다. 즉 원문 소책자의 마지막 4쪽 가량 — 구면 위의 원반 비유를 3차원으로 확장하는 대목과 결론부 — 이 이 스캔본에는 빠져 있다.
둘째, 영어본(자료번호 3-06)은 MacTutor 수학사 아카이브(University of St Andrews)에 게재된 텍스트로, “이 강연은 1922년 런던의 Methuen & Co. Ltd에 의해 출판되었다”고 명시된 1922년 당시의 정식 영어 번역본이며 완전한 전문이다.
이에 따라 이 번역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영어본(3-06)을 저본으로 삼아 전문을 옮기되, 독일어 원문이 남아 있는 앞부분(약 4분의 3 지점까지)은 독일어 표현을 직접 대조하여 번역어를 확정했다. 두 자료 모두 1921~1922년에 출판된 것으로 저작권 보호 기간이 지난 지 오래된 퍼블릭 도메인 자료이며(아인슈타인 사망 1955년, 저작권 만료 2025년), 영어본 역시 그 자체로 1922년의 정식 승인 번역이므로 완역의 저본으로 삼는 데 문제가 없다.
이 글은 원문에 번호가 매겨진 절 구분이 없고 하나의 흐르는 강연 원고 형태이다. 아래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내용 단위를 나누는 소제목을 옮긴이가 임의로 붙였으며(원문에는 없음), 본문 자체의 문장·논증 순서는 그대로 따랐다.
용어는 이 프로젝트의 기존 번역들과 통일했다: 강체(rigid body), 공리(axiom), 공리론/공리기하학(axiomatics/axiomatic geometry), 실천기하학(practical geometry), 일반공변방정식(generally covariant equations), 리만 기하학(Riemannian geometry), 관성계/비관성계(inertial/non-inertial system) 등.
수학이 다른 모든 학문보다 특별한 존경을 받는 한 가지 이유는, 수학의 명제들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반박할 수 없는 반면, 다른 모든 학문의 명제들은 어느 정도 논쟁의 여지가 있고 새로 발견된 사실에 의해 언제든 뒤집힐 위험에 놓여 있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수학자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만약 수학의 법칙들이 우리의 순전한 상상의 대상만을 가리킬 뿐, 현실의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이미 근본 법칙(공리)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부터 다른 법칙을 이끌어내는 방법에 대해서 합의한 다음에는 같은 논리적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이 높은 명성을 누리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으니, 정밀 자연과학이 수학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수학이 부여해준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시대의 탐구하는 정신을 줄곧 괴롭혀 온 하나의 수수께끼가 나타난다. 경험과 무관한 인간 사유의 산물일 뿐인 수학이 어떻게 현실의 대상에 그토록 놀랍도록 잘 들어맞을 수 있는가? 인간의 이성은 경험 없이 순전한 사유만으로 실제 사물의 성질을 규명해낼 수 있는 것인가?
나의 견해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히 다음과 같다 — 수학의 명제들이 현실을 가리키는 한 그것들은 확실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확실한 한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사태에 대한 완전한 명료함은, “공리론(Axiomatik)”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수학의 새로운 방향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공유 재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공리론이 이루어낸 진보는, 논리-형식적인 것을 그것의 사실적 혹은 직관적 내용으로부터 깔끔하게 분리해냈다는 데 있다. 공리론에 따르면 오직 논리-형식적인 것만이 수학의 대상을 이루며, 논리-형식적인 것과 결부된 직관적 내용이나 그 밖의 내용은 수학의 대상이 아니다.
이 관점에서 기하학의 어떤 공리, 예컨대 다음과 같은 공리를 한번 살펴보자: “공간의 두 점을 지나는 직선은 언제나 오직 하나뿐이다.” 이 공리는 옛 의미와 새로운 의미에서 각각 어떻게 해석되는가?
옛 해석. 누구나 직선이 무엇이고 점이 무엇인지 안다. 이 앎이 인간 정신의 어떤 능력에서 비롯되는지, 경험에서 비롯되는지, 이 둘의 협력에서 비롯되는지, 혹은 다른 어딘가에서 비롯되는지는 수학자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철학자에게 맡길 문제다. 모든 수학에 앞서 주어진 이 앎에 근거하여, 앞서 말한 공리는 (다른 모든 공리와 마찬가지로) 자명하다. 즉 그것은 이 선험적 지식의 일부를 표현한 것이다.
새로운 해석. 기하학은 직선, 점 등의 낱말로 지칭되는 대상들을 다룬다. 이 대상들에 관해서는 어떠한 지식이나 직관도 전제되지 않으며, 오직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공리들의 타당성만이 — 순전히 형식적인 의미로, 즉 직관이나 경험의 내용에서 벗어난 것으로 — 전제될 뿐이다. 이 공리들은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다. 기하학의 다른 모든 명제는 이 공리들로부터의 논리적 귀결이다(공리는 오직 유명론적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기하학이 다루는 대상은 오로지 공리에 의해서만 비로소 정의된다. 그래서 슐리크(Schlick)는 그의 인식론 저서에서 공리를 아주 적절하게 “함축적 정의(implizite Definitionen)”라 불렀다.
현대 공리론이 내세우는 이러한 공리관은 수학에 속하지 않는 모든 요소를 걷어내고, 그럼으로써 예전에 수학의 근거를 뒤덮고 있던 신비로운 어둠을 걷어낸다. 그러나 이렇게 정화된 서술은 또한, 수학 그 자체는 직관의 대상에 대해서도 현실의 대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진술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다. 공리기하학에서 “점”, “직선” 등은 내용이 텅 빈 개념적 틀에 불과하다. 그것들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수학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수학 일반이, 특히 기하학이, 실제 사물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필요에서 그 존재를 얻었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 “기하학(Geometrie)”이라는 낱말 자체가 “토지 측량”을 뜻한다는 사실이 이를 이미 증명해준다. 왜냐하면 토지 측량은 어떤 자연물들 — 즉 지구의 부분들, 측정줄, 측정 막대 등 — 이 서로 어떻게 상대적으로 배치될 수 있는지를 다루기 때문이다. 공리기하학의 개념 체계만으로는 우리가 실천적으로 강체(强體)라 부르고자 하는 이러한 현실의 대상들의 행태에 관해 아무런 진술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진술을 가능하게 하려면 기하학은 순전히 논리-형식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명제만 덧붙이면 된다: 고체는 그 가능한 배치에 관한 한, 3차원 유클리드 기하학의 물체들처럼 행동한다. 그러면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제들은 실천적으로 강체인 물체들의 관계에 관한 주장을 담게 된다.
이렇게 보완된 기하학은 명백히 하나의 자연과학이다. 우리는 그것을 물리학의 가장 오래된 분과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그 주장들은 본질적으로 경험으로부터의 귀납에 의거하며, 논리적 추론에만 의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보완된 기하학을 “실천기하학(praktische Geometrie)”이라 부르고, 이를 이후 “순수 공리기하학(rein axiomatische Geometrie)”과 구별하고자 한다. 우주의 실천기하학이 유클리드적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명확한 의미를 지니며, 그 답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물리학에서의 모든 길이 측정은 이러한 의미의 실천기하학이며, 빛이 (실천기하학의 의미에서) 직선으로 전파된다는 경험 법칙을 원용한다면 측지학적·천문학적 길이 측정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방금 설명한 이러한 기하학관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내가 상대성이론을 정립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관성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회전하는 기준계에서는, 로렌츠 수축 때문에 강체의 배치 법칙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규칙에 들어맞지 않는다. 따라서 비관성계를 대등한 계로 인정한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을 버려야만 한다. 일반공변방정식으로의 이행이라는 결정적 발걸음은, 만약 위와 같은 해석이 그 발판이 되어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내디뎌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리기하학의 물체와 현실의 실천적 강체 사이의 관계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쉽사리 다음과 같은 견해에 이르게 된다 — 특히 예리하고 깊이 있는 사상가인 푸앵카레(H. Poincaré)가 지지했던 견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공리기하학 가운데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단순함으로 두드러진다. 그런데 공리기하학 그 자체만으로는 경험 가능한 현실에 관해 아무 주장도 담지 못하고, 오직 물리학의 명제들과 결합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 현실이 어떻게 되어 있든 간에 — 유클리드 기하학을 고수하는 것이 가능하고도 합리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론과 경험 사이에 모순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공리적 유클리드 기하학을 바꾸기보다는 차라리 물리학의 법칙을 바꾸는 쪽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천적 강체와 기하학 사이의 관계를 부정한다면, 사실 사람들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장 단순한 것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관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푸앵카레와 다른 연구자들은, 그토록 가까이 있어 보이는 실천적 강체와 기하학의 물체 사이의 등가성을 부정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의 실제 고체들은 강체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들의 기하학적 행태, 즉 상대적 배치 가능성이 온도나 외력 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하학과 물리적 현실 사이의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는 깨진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좀 더 일반적인 견해로 떠밀리게 된다 — 이것이 바로 푸앵카레의 입장을 특징짓는다. 기하학(G)은 실제 사물들의 관계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오직 기하학이 물리 법칙의 총체 (P)와 결합할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기호로 표현하면, 오직 (G) + (P)의 합만이 경험의 검증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G)는 임의로 선택될 수 있으며, (P)의 일부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은 관례(Konvention)다.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G)와 (P) 전체가 함께 경험에 부합하도록 (P)의 나머지를 적절히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보면 공리기하학과 관례로 격상된 자연법칙의 일부는 인식론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나타난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자면(Sub specie aeterni) 나는 이 점에서 푸앵카레가 옳다고 생각한다. 측정체(측정봉)라는 개념과, 상대성이론에서 그것과 짝을 이루는 측정시계라는 개념은 실제 세계에서 정확히 대응하는 대상을 갖지 못한다. 또한 고체와 시계가 물리학의 개념 체계에서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 요소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합성된 구성물의 역할을 한다는 것 — 즉 이론물리학 안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해서는 안 되는 것 — 역시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확신으로는, 이론물리학이 오늘날 도달한 발전 단계에서는 이 개념들이 여전히 독립된 개념으로 원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그러한 구성물들에 관해 정밀한 이론적 구성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이론적 토대에 대한 확실한 지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에는 진정으로 강체인 물체가 없으며, 따라서 강체에 대해 주장되는 성질들은 결코 물리적 현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라는 반론에 관해 말하자면, 이 반론은 언뜻 피상적으로 살펴볼 때 그럴싸해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근본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측정체의 물리적 상태를, 다른 측정체들에 대한 상대적 배치와 관련하여 그 행태가 충분히 명확해서 “강체”를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하게 규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강체에 관한 진술은 바로 이러한 측정체들에 대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실천기하학은 경험으로 접근 가능한 하나의 원칙 위에 서 있으며, 이제 이를 함께 확인해보고자 한다. 실천적 강체 위에 표시된 두 표지 사이에 담긴 것을 우리는 “구간(Strecke)”이라 부른다. 우리는 실천적으로 강체인 두 물체를 상상하고, 각각에 하나의 구간을 표시해둔다. 이 두 구간은, 한 구간의 표지들을 다른 구간의 표지들과 지속적으로 일치시킬 수 있을 때 “서로 같다”고 불린다. 이제 다음을 전제한다:
만약 두 구간이 한 번, 어디에서든 같다고 확인되었다면, 그것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같다.
유클리드의 실천기하학뿐만 아니라 그 다음 단계의 일반화, 즉 리만의 실천기하학,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일반상대성이론 역시 이러한 전제 위에 서 있다. 이 전제가 성립함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근거 가운데 나는 하나만 들고자 한다. 텅 빈 공간에서의 빛의 전파라는 현상은 각각의 국소 시간 간격에 하나의 구간, 즉 해당하는 빛의 경로를 대응시키며 그 역도 성립한다. 이와 관련하여, 구간에 대해 앞서 말한 전제는 상대성이론에서 시계-시간 간격에 대해서도 성립해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만약 두 개의 이상적인 시계가 (서로 바로 인접해 있는 상태에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같은 빠르기로 간다면, 그것들은 이후 어디서 언제 다시 같은 장소에서 비교되든 항상 같은 빠르기로 간다. 만약 자연의 시계에 대해 이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같은 화학 원소의 개별 원자들의 고유 진동수는 경험이 보여주는 것만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날카로운 스펙트럼선의 존재야말로 실천기하학의 이 원칙을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경험적 증거다. 궁극적으로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리만이 뜻한 의미에서 4차원 시공 연속체의 계량(Metrik)에 관해 의미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이 연속체가 유클리드적인지, 일반적인 리만식 구조를 따르는지, 아니면 다른 구조를 따르는지의 물음은, 여기서 옹호하는 견해에 따르면 진정한 물리적 물음이며, 목적 적합성의 근거에서 선택되는 단순한 관례의 물음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답해져야 하는 물음이다. 리만 기하학은, 실천적 강체의 배치 법칙이 고려되는 시공 영역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유클리드 기하학 물체의 배치 법칙에 더욱 정확하게 가까워질 때 성립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옹호되는 기하학의 물리적 해석은, 아원자적 크기의 공간에 직접 적용될 때는 실제로 무너진다. 그럼에도 그것은 소립자의 구성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그 중요성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물질을 구성하는 전기적 소립자를 기술하는 문제에서도, 분자보다 훨씬 큰 물체의 기하학적 행태를 기술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정의된 장(場) 개념들에 물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성공만이 그러한 시도의 정당성을 판가름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리만 기하학의 근본 개념들에 대해, 그것이 물리적으로 정의된 영역 너머까지 물리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외삽은, 분자 크기의 물체 일부에 온도 개념을 외삽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밝혀질지도 모른다.
실천기하학의 개념을 우주적 크기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일은 이보다는 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물론, 고체 막대로 이루어진 구성물은 그 공간적 크기가 커질수록 이상적인 강성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반론에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우주가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 실천기하학의 의미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물음이 머지않아 천문학에 의해 답해질 가능성조차 배제하지 않는다.
일반상대성이론이 이 점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상기해보자. 그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이는 오직, 별들에 집중된 물질의 우주 공간 내 평균 공간 밀도가 사라질 때 — 즉 별들의 총질량과 그것들이 흩어져 있는 공간의 크기의 비가, 고려되는 공간이 점점 더 커짐에 따라 한없이 영(零)에 가까워질 때 — 에만 가능하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이는 우주 공간에 영이 아닌 평균 밀도를 지닌 무게 있는 물질이 존재할 때 반드시 그러하다. 그 평균 밀도가 작을수록 우주 공간의 부피는 커진다.
유한한 우주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도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어떤 물체 주위에 무게 있는 질량들이 더 많이 있을수록 그 물체의 관성이 더 커진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뉴턴 이래 중력이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완전히 환원되어 온 것처럼, 한 물체의 관성 작용 전체를 그 물체와 우주의 다른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환원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으로부터, 질량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관성을 완전히 환원하는 이러한 일 — 예컨대 E. 마흐(Mach)가 요구했던 바와 같은 — 은 오직 우주가 공간적으로 유한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다.
많은 물리학자와 천문학자에게 이 논증은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한다. 결국 이 두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이 자연에서 실현되어 있는지는 오직 경험만이 결정할 수 있다. 경험은 어떻게 답을 줄 수 있을까? 우선 우리의 지각이 미치는 우주의 일부를 관측하여 물질의 평균 밀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헛되다. 눈에 보이는 별들의 분포는 대단히 불규칙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 내 별 물질의 평균 밀도를 이를테면 은하수 내의 평균 밀도와 같다고 결코 대담하게 놓을 수 없다. 게다가 아무리 넓은 공간을 탐사했다 하더라도, 그 공간 너머에는 별이 더는 없다고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평균 밀도를 추정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비록 큰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 더 실행 가능해 보이는 또 다른 길이 있다. 일반상대성이론의 귀결 가운데 경험으로 접근 가능한 것들을 뉴턴 이론의 귀결과 비교했을 때 나타나는 편차를 물어보면, 우선 중력을 미치는 질량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타나는 편차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수성(水星)의 경우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만약 우주가 공간적으로 유한하다면, 뉴턴 이론과 다른 두 번째 편차가 있다. 이는 뉴턴 이론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중력장은, 마치 무게 있는 질량들뿐만 아니라 공간 전체에 걸쳐 균일하게 분포된 음(陰)의 부호를 지닌 질량 밀도에 의해서도 생겨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 가상의 질량 밀도는 엄청나게 작아야 하므로, 그것은 오직 매우 큰 크기의 중력계에서만 그 존재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예컨대 우리가 은하수 내 별들의 통계적 분포와 그 질량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뉴턴의 법칙에 따라 중력장을 계산할 수 있고, 은하수가 그 별들 사이의 상호 인력 때문에 스스로 붕괴하지 않고 실제 크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별들의 평균 속도 역시 계산할 수 있다. 만약 (측정 가능한) 별들의 실제 속도가 이렇게 계산된 속도보다 작다면, 먼 거리에서의 실제 인력이 뉴턴의 법칙에 따른 것보다 작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러한 편차로부터 우주가 유한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공간적 크기까지도 추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무경계인 3차원 우주를 직관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보통의 답은 “아니오”이지만, 그것은 옳은 답이 아니다. 이어지는 논의의 목적은 그 답이 “예”여야 함을 보이는 데 있다. 나는 우리가 특별한 수고 없이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유한한 우주에 관한 직관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먼저 인식론적인 성격의 소견 하나를 말해두자. 기하학적-물리적 이론은 그 자체로는 필연적으로 직관 불가능하며, 순전한 개념 체계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실제의 혹은 상상된 감각 경험의 다수를 사유 속에서 연관 짓는 데 쓰인다. 어떤 이론을 “직관화한다”는 것은, 그 이론이 도식적으로 정리해주는 그 풍부한 경험을 표상으로 가져오는 것을 뜻한다. 지금 우리의 경우, 유한한 우주에 관한 이론에 대응하는, 고체들의 상호 배치(접촉)에 관한 행태를 우리가 어떻게 표상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에 관해 내가 말하려는 것에는 사실 새로운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나에게 던져진 수많은 질문들은, 이 문제에 관한 지적 갈증이 아직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미 잘 알고 있는 분들은, 다소 잘 알려진 이야기를 다시 꺼내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우리의 공간이 무한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크기가 같은 물체를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공간을 결코 다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크기가 모두 같은 나무 정육면체 상자들을 많이 만들어두었다고 하자.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라 이것들을 위로, 옆으로, 뒤로 쌓아서 얼마든지 큰 공간의 일부를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정육면체들을 계속 덧붙일 수 있고, 자리가 부족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공간이 무한하다고 말할 때 표현하려는 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천적으로 강체인 물체들에 대해 공간이 무한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다만 이 물체들의 배치 법칙이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주어진다고 전제할 때 그렇다.
무한한 연속체의 또 다른 예는 평면이다. 평면 위에서는 정사각형 마분지 조각들을 나란히 늘어놓아, 각 정사각형의 네 변마다 다른 정사각형의 한 변이 맞닿도록 할 수 있다. 이 작업 역시 결코 끝나지 않는다 — 그 마분지 정사각형들의 배치 법칙이 유클리드 평면 도형의 법칙에 들어맞는 한, 새로운 정사각형을 얼마든지 계속 붙여나갈 수 있다. 따라서 마분지 정사각형에 대해 평면은 무한하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평면을 2차원의 무한 연속체라 하고, 공간을 3차원의 무한 연속체라 부른다. 여기서 차원의 수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미 알려진 것으로 전제해도 될 것이다.
이제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는 2차원 연속체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커다란 구(球, 지구본과 같은)의 표면과, 모두 같은 크기의 둥근 종이 원반들을 상상한다. 이 원반 하나를 구면 위 어딘가에 붙인다. 손가락으로 원반을 구면 위 어디로든 움직여도, 그 여정 어디에서도 경계에 부딪히는 일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구본 구면이 무경계 연속체라고 말한다. 나아가 구면은 유한한 연속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두 원반이 결코 서로 겹치지 않도록 종이 원반들을 구면 위에 계속 붙여나가면, 구면은 결국 완전히 가득 차서 더 이상 새 원반이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종이 원반에 대해 이 지구본의 구면이 유한하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구면은 2차원의 비유클리드 연속체이다. 즉 구면 위에 놓인 강체 도형들의 배치 법칙은 유클리드 평면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원반 하나 둘레에 그것과 접하는 원반 여섯 개를 원 모양으로 놓고, 다시 그 각각을 여섯 개의 원반으로 둘러싸는 식으로 계속한다고 하자. 이 구성을 평면 위에서 하면, 바깥쪽에 있지 않은 모든 원반이 정확히 여섯 개의 원반과 접하는 빈틈없는 배치가 만들어진다. 구면 위에서는 이 구성이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 보이며, 원반의 반지름이 구의 반지름에 비해 작을수록 더욱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구성이 진행될수록, 이러한 방식의 원반 배치가 (평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처럼) 빈틈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 이런 식으로, 구면을 떠날 수 없고 구면 밖 3차원 공간으로 고개조차 내밀 수 없는 존재들도, 단지 원반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2차원 “공간”이 유클리드적이지 않고 구면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성이론의 최신 성과에 따르면, 우리의 3차원 공간 역시 대략 구면적일 가능성이 크다. 즉 그 안에서 강체의 배치 법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라 (충분히 큰 영역을 고려할 경우) 대략 구면 기하학에 의해 주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독자의 직관이 반발하는 지점에 이른다. “그런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고 독자는 분개하며 외칠 것이다. “말할 수는 있어도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구면이라면 충분히 표상할 수 있지만, 3차원에서 그와 비슷한 것은 전혀 표상할 수 없다.”
우리는 정신 속의 이 장벽을 넘어서야 하며, 인내심 있는 독자라면 이것이 결코 특별히 어려운 과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다시 한번 2차원 구면의 기하학에 주목해보자.
옆 그림에서 KKK를 구면이라 하고, 이 구면이 (편의상 유한한 면으로 그려진) 평면 EEE와 SSS에서 접한다고 하자. LLL을 구면 위의 한 원반이라 하자. 이제 구면 위에서 SSS의 정반대편에 있는 점 NNN에 광원이 있어서, 원반 LLL의 그림자 L′을 평면 EEE 위에 드리운다고 상상해보자. 구면 위의 모든 점은 평면 위에 그 그림자를 갖는다. 구면 KKK 위의 원반이 움직이면, 평면 EEE 위의 그 그림자 L′도 움직인다. 원반 LLL이 SSS에 있을 때는 그 그림자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만약 원반이 구면 위에서 SSS로부터 멀어져 위로 움직이면, 평면 위의 그림자 L′ 역시 SSS로부터 바깥쪽으로 멀어지며 점점 더 커진다. 원반 LLL이 광원 NNN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자는 무한히 멀어지며 무한히 커진다.
이제 물어보자. 평면 EEE 위에서 원반 그림자들 L′의 배치 법칙은 어떠한가? 그것은 분명 구면 위의 원반 LLL들의 배치 법칙과 정확히 같다. 왜냐하면 KKK 위의 원래 도형마다 EEE 위에 대응하는 그림자 도형이 있기 때문이다. KKK 위의 두 원반이 접해 있다면, EEE 위의 그 그림자들도 접해 있다. 평면 위의 그림자 기하학은 구면 위의 원반 기하학과 일치한다. 만약 우리가 원반 그림자를 강체 도형이라 부른다면, 이 강체 도형들에 관한 한 평면 EEE 위에서는 구면 기하학이 성립한다. 게다가 평면 위에는 오직 유한한 수의 그림자만 자리를 잡을 수 있으므로, 그림자에 관한 한 평면은 유한하다.
이 대목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원반 그림자는 강체 도형이 아니다. 평면 EEE 위에서 2피트짜리 자를 움직여보기만 해도, 그림자들이 SSS로부터 멀어져 평면상의 무한대를 향해 나아갈수록 계속 커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2피트 자가 평면 EEE 위에서 원반 그림자 L′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그림자가 멀어질수록 커진다는 것을 보여줄 방법이 없어질 것이며, 그런 주장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원반 그림자들에 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객관적 진술은 다만 이것뿐이다 — 그것들은 구면 위의 강체 원반들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의미에서 맺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
우리는 다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림자 L′이 SSS로부터 멀어져 무한대를 향해 갈수록 커진다는 우리의 진술은, 그림자들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평면 EEE 위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유클리드적 강체를 사용할 수 없는 한,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객관적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림자 L′의 배치 법칙에 관한 한, 점 SSS는 구면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평면 위에서도 아무런 특권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평면 위에 나타낸 구면 기하학은 우리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3차원의 경우로 손쉽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공간의 한 점 SSS와, 서로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는 수많은 작은 구(球) L′들을 상상해보자. 다만 이 구들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의미에서 강체가 아니며, SSS로부터 무한대를 향해 멀어질수록 (유클리드 기하학의 의미에서) 그 반지름이 커진다 — 그리고 이 증가는, 평면 위에서 원반 그림자 L′의 반지름이 커지는 것과 정확히 같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우리의 L′ 구들의 기하학적 행태에 관해 생생한 심상을 얻은 뒤, 이제 우리 공간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의미에서의 강체가 전혀 없고 오직 우리의 L′ 구들과 같은 행태를 지닌 물체들만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3차원 구면 공간, 아니 정확히 말해 3차원 구면 기하학에 대한 생생한 표상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구들은 “강체” 구라고 불려야 한다. 그것들이 SSS에서 멀어질수록 커지는 것은, 평면 EEE 위의 원반 그림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측정봉으로 재서는 결코 검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측정의 표준 자체가 그 구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공간은 균질(均質)하다. 즉 모든 점 주변에서 동일한 구면 구성이 가능하다. (이것은 계산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 다만 2차원의 경우에 한해서만 그러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시 한번 구면 위의 원반이라는 경우로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 공간은 유한하다. 왜냐하면 구들이 “커지는” 결과로, 오직 유한한 수의 구만이 공간에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이 우리에게 주는 사유와 직관의 훈련을 발판으로 삼아, 우리는 구면 기하학에 대한 심상을 얻게 되었다. 특별한 상상의 구성을 수행함으로써 이 생각들에 더 깊이와 힘을 부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타원 기하학의 경우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나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의 직관 능력이 비유클리드 기하학 앞에서 결코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님을 보이는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