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제14장·다른 부록 —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예상 읽기 시간 약 23분

부제: 한 사람이 연 두 혁명,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대화
핵심 질문: 양자혁명의 개척자 아인슈타인은 왜 완성된 양자역학을 끝까지 의심했으며, 그 의심은 현대 물리학에 무엇을 남겼는가?


프롤로그 — 한 사람이 연 두 혁명

1905년의 베른 특허청으로 가 보자. 책상에는 발명 설명서와 도면이 쌓여 있고, 스물여섯 살의 3급 기술전문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낮에는 남의 발명을 심사하고 퇴근 뒤에는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을 고쳐 쓰고 있었다.

그해 그가 발표한 두 논문은 서로 다른 세계의 문을 열었다. 한 편은 빛의 속도를 출발점으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다시 세웠다. 훗날 특수상대성이론이라 불릴 혁명이었다. 다른 한 편은 빛이 어떤 현상에서는 에너지 덩어리처럼 행동한다고 제안했다. 훗날 광자라고 불리게 될 생각이었다.

오늘의 교과서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이라고 나란히 적는다. 그래서 두 이론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세운 경쟁 건물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두 건물의 첫 설계도에는 모두 아인슈타인의 손자국이 남아 있다.

그는 양자론에 뒤늦게 나타난 보수적 반대자가 아니었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누구보다 과감하게 밀어붙였고, 광전효과의 법칙을 설명했으며,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이 함께 필요하다는 단서를 발견했다. 원자의 빛 방출을 확률로 다루고, 보스의 통계를 알아보았으며, 물질이 하나의 거대한 양자 상태로 모일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런 사람이 훗날 보어와 논쟁하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문제 제기는 양자 현상의 존재 여부가 아니었다. 실험과 잘 맞는 이론을 폐기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이 이론은 자연에서 일어날 일을 훌륭하게 예측한다. 그렇다면 자연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완전하게 말해 주는가?

이 질문은 보어·하이젠베르크·슈뢰딩거·보른과의 대화가 되었고, EPR과 벨의 정리를 거쳐 오늘날 양자정보과학에 닿았다. 이 부록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이 두 혁명의 탄생에 관여하고, 둘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끝내 하나의 자연관 안에 넣으려 했던 이야기다.


제1부 — 양자의 문을 연 아인슈타인

제1절. 플랑크가 열어 둔 문

막스 플랑크 초상

막스 플랑크(1858–1947) — 흑체복사 문제에서 에너지 양자라는 뜻밖의 문을 열었다.

1900년 12월 막스 플랑크는 뜨거운 물체가 내는 빛의 분포를 설명하는 공식을 발표했다. 계산이 실험과 맞으려면 물질 진동자가 에너지를 아무 양이나 연속적으로 주고받는다고 볼 수 없었다. 에너지가 진동수에 비례하는 작은 단위로 교환된다고 놓아야 했다.

$$E=h\nu$$

그러나 플랑크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광자를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주로 빛과 물질이 에너지를 교환하는 방식을 다루었고, 그 불연속성이 고전물리학 안에서 이해될 가능성을 오래 놓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이 조심스러운 문을 활짝 열었다. 1905년 그는 어떤 현상에서는 빛 자체가 공간에 국소화된 에너지 양자로 행동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파동으로 잘 설명되던 빛에 알갱이의 얼굴을 되돌려 준 셈이었다.

플랑크조차 이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3년 플랑크와 동료들이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초빙하며 작성한 추천서에는 광양자 가설 같은 시도가 과녁을 벗어났을 가능성을 너그럽게 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문장까지 들어갔다. 양자 개념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그 의미를 제한하려 했고, 그것을 받아 든 젊은이는 빛의 본성 전체를 다시 물었다.

의견 차이가 존중을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일찍 알아본 원로였고 직접 취리히를 찾아가 베를린행을 권했다. 두 사람은 음악도 함께 연주했다. 플랑크는 피아노를,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을 맡았다. 학문에서는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였지만, 상대가 진리를 진지하게 추구한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2절. 빛은 파동인가, 알갱이인가

금속에 빛을 비추면 전자가 튀어나온다. 고전적인 파동 그림만 따르면 강한 빛을 오래 비출수록 전자가 더 큰 에너지를 얻을 듯하다. 그러나 빛이 일정한 진동수보다 낮으면 아무리 강해도 전자가 나오지 않았고, 진동수가 높을수록 전자의 최대 에너지가 커졌다.

아인슈타인은 빛 한 양자의 에너지 $h\nu$ 가운데 일부가 전자를 꺼내는 데 쓰이고 나머지가 운동에너지로 남는다고 설명했다. 빛의 세기는 주로 양자의 수를 늘리지만, 양자 하나의 에너지는 진동수가 결정한다는 뜻이었다. 이 설명은 즉시 환영받지 않았으나 후속 실험과 양자 현상이 쌓이며 힘을 얻었다. 아인슈타인의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 공식 사유가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이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이 빛을 작은 탄환으로만 본 것은 아니다. 간섭과 회절에서는 빛이 분명 파동처럼 행동했다. 그는 1909년 복사의 에너지 요동을 분석하며 계산 안에 파동적인 항과 입자적인 항이 함께 나타남을 강조했다. 자연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기보다 당시의 개념만으로 둘을 동시에 담을 수 없다는 신호였다. 훗날 보어가 상보성이라는 말로 정리할 난점이 이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3절. 원자는 빛을 어떻게 내놓는가

1916~1917년 아인슈타인은 원자가 빛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과정을 새롭게 정리했다. 외부 빛을 받아 높은 에너지 상태로 가는 흡수, 스스로 빛을 내는 자발방출, 지나가던 빛의 자극을 받아 같은 성질의 빛을 더 내놓는 유도방출에 확률 계수를 부여했다. 오늘날 아인슈타인의 A·B 계수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수십 년 뒤 메이저와 레이저는 유도방출을 실제 장치로 구현했다. 아인슈타인이 레이저를 설계한 것은 아니며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의 후속 성과가 필요했다. 다만 동일한 빛을 증폭하는 물리적 씨앗이 그의 복사 이론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확률을 불편해했다고 알려진 그가 여기서는 자발방출을 확률 과정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그의 불만은 확률 계산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훗날 그가 물은 것은 확률이 자연에 대한 최종 설명인지, 더 깊은 층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지였다.

제4절. 다카에서 온 원고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 초상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1894–1974) — 광자를 세는 새로운 통계법을 제안했고 아인슈타인은 그 생각을 원자 기체로 확장했다.

1924년 인도 다카 대학의 사트옌드라 나트 보스는 플랑크의 복사 법칙을 새로운 통계로 유도한 논문을 아인슈타인에게 보냈다. 유명 학자에게 도착하는 수많은 투고 가운데 하나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중요성을 알아보았다. 논문을 독일어로 옮겨 학술지에 전달했고, 보스의 방법을 빛에서 질량을 가진 입자들의 기체로 확장했다. 그 계산에서는 충분히 낮은 온도에서 특정 종류의 입자들이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에 집단적으로 모일 가능성이 나타났다. 오늘날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예측에서 희박한 원자 기체의 실험 구현까지는 약 70년이 걸렸다.

이 장면에서 아인슈타인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젊은 연구자의 생각을 세상에 연결한 과학자였고, 동시에 그 결과에서 새로운 물리학을 끌어낸 연구자였다. 양자역학과의 갈등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양자론의 경계를 넓히고 있었다.

제5절. 드브로이의 파도, 슈뢰딩거의 방정식

루이 드브로이 초상

루이 드브로이(1892–1987) — 빛뿐 아니라 물질에도 파동성이 있을 수 있다는 대칭적 생각을 제안했다.

에르빈 슈뢰딩거 초상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 — 물질파의 생각을 파동방정식으로 발전시키면서도 그 해석에는 날카로운 의문을 남겼다.

같은 해 루이 드브로이는 대담한 역전을 제안했다. 빛이 파동이면서 입자라면, 입자로 알려진 물질에도 파동의 성질이 있지 않을까? 물질파 관계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생각과 상대론적 에너지·운동량 관계에서 중요한 영감을 얻었다.

지도교수 폴 랑주뱅은 이 낯선 논문을 어떻게 평가할지 고민하며 아인슈타인에게 의견을 구했다. 아인슈타인은 드브로이가 ‘큰 베일의 한 귀퉁이’를 들어 올렸다는 취지로 높이 평가했다. 정확한 번역 문구는 판본에 따라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가 연구의 중요성을 일찍 인정한 사실은 분명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기체 이론에서 드브로이의 물질파를 언급했고, 그 연결은 에르빈 슈뢰딩거에게 닿았다. 슈뢰딩거가 물질파를 지배할 방정식을 찾으면서 1926년 파동역학이 등장했다. 드브로이와 슈뢰딩거의 독창성은 각자의 것이지만, 광양자에서 물질파로, 다시 파동방정식으로 이어진 계보에서 아인슈타인은 반복해서 연결점이 되었다.


인터미션 — 아인슈타인이 양자물리학에 준 다섯 가지 선물

  1. 빛의 양자 — 빛 자체의 양자적 구조를 밀어붙이고 광전효과를 설명했다.
  2. 파동과 입자를 함께 보라는 요구 — 복사 요동에서 두 성격이 함께 필요하다는 단서를 드러냈다.
  3. 방출의 확률과 유도방출 — 원자의 흡수·자발방출·유도방출을 한 틀로 정리했다.
  4. 새로운 통계와 물질 상태 — 보스의 통계를 확장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을 예측했다.
  5. 이론의 의미를 시험하는 질문 — EPR을 통해 얽힘·완전성·국소성을 검토할 길을 열었다.

앞의 네 선물이 새로운 현상과 이론을 열었다면 다섯 번째 선물은 이론이 무엇을 뜻하는지 끝까지 묻는 태도였다. 이제 이야기는 바로 그 질문으로 넘어간다.


제2부 — 실재를 둘러싼 우정 어린 전쟁

제1절. 베를린에서 만난 아인슈타인과 보어

닐스 보어 초상

닐스 보어(1885–1962) — 양자론의 해석을 아인슈타인과 평생 토론하며 서로의 질문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1920년 베를린에서 처음 만났다. 보어는 원자의 선 스펙트럼을 설명하기 위해 전자가 허용된 궤도 사이를 불연속적으로 옮겨 다닌다는 모형을 세운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지성을 깊이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슷한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기에 더 깊이 충돌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론이 관측 결과만 계산해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리학은 관측되지 않는 순간에도 자연이 어떠한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보어는 양자 현상에서 측정 장치와 대상을 완전히 분리해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일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떤 실험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성질이 달라지고, 서로 배타적인 실험들이 함께 대상을 온전히 기술한다는 상보성의 생각으로 나아갔다.

한쪽이 실험을 믿고 다른 쪽이 철학만 말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양자 이론의 성공을 인정했다. 다만 성공한 계산이 자연에 대한 완전한 설명인지에 관해 서로 다른 기준을 가졌다.

제2절. 젊은이들이 만든 낯선 역학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초상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 — 관측 가능한 양만으로 원자를 기술하는 행렬역학과 불확정성원리를 세웠다.

막스 보른 초상

막스 보른(1882–1970) — 파동함수를 확률로 해석했고, 아인슈타인과 오랜 서신 논쟁을 이어 갔다.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관측 가능한 스펙트럼을 중심으로 원자를 기술했다. 전자가 실제로 어떤 궤도를 돈다는 그림을 버리고 관측 결과 사이의 관계만 계산에 넣었다.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은 그 규칙이 행렬 수학과 연결됨을 알아보았다.

이듬해 슈뢰딩거는 물질파를 기술하는 방정식을 내놓았다.

$$i\hbar\frac{\partial\psi}{\partial t}=\hat H\psi$$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은 생김새가 달랐지만 곧 수학적으로 동등함이 밝혀졌다. 그러나 $\psi$가 실제로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막스 보른은 파동함수의 제곱이 측정 결과의 확률을 준다고 해석했다.

파동함수의 시간 변화는 엄격한 법칙을 따르지만 측정에서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만 나타난다. 결과는 측정 전부터 정해져 있었는가? 파동함수는 실제 사물인가, 지식의 도구인가? ‘양자역학’은 놀라운 속도로 성공했으나 그 계산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에는 합의가 없었다.

제3절. 무엇을 볼 수 있는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1926년 하이젠베르크는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후대 회고에 따르면, 관측 가능한 것만 이론에 넣었다는 점을 설명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이 관측 불가능한 절대 동시성을 걷어냈듯, 자신도 관측할 수 없는 전자 궤도를 버렸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무엇을 관측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이론이 결정한다는 취지로 반문했다. 검출기의 소리나 사진판의 얼룩은 그 자체로 ‘전자’가 아니다. 어떤 이론적 연결을 받아들여야 특정 대상의 관측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확한 문장은 하이젠베르크의 회고를 통해 전해지므로 현장 녹취처럼 취급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의 차이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의미가 있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관계를 제시했다.

$$\Delta x,\Delta p\geq\frac{\hbar}{2}$$

이는 장비가 서툴다는 뜻이 아니라, 양자 상태가 위치와 운동량에 대해 동시에 날카로운 값을 갖도록 준비될 수 없다는 구조적 제약이다. 다만 이 수학적 관계가 ‘측정 전에는 어떤 성질도 없다’는 하나의 철학적 결론을 자동으로 강제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제4절. 솔베이의 밤과 광자 상자

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대화하는 아인슈타인과 보어

아인슈타인과 보어 — 한 사람의 끈질긴 사고실험과 다른 사람의 응답이 양자역학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들었다.

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한계를 드러낼 사고실험들을 제시했다. 보어는 어느 한 정보를 더 정확히 얻으려 할 때 다른 정보를 얻는 실험 조건이 무너진다고 설명하려 했다. 토론의 세부는 보어의 후대 회고 등에 의존하므로 매일 아침 문제가 나오고 밤마다 완벽한 해답이 제출됐다는 식의 과도한 극화는 피해야 한다. 다만 아인슈타인의 반론이 보어에게 긴장을 주고 상보성의 의미를 더 세밀하게 다듬게 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30년의 ‘광자 상자’는 특히 인상적이다. 빛이 든 상자에 시계와 셔터를 달아 짧은 순간 광자 하나를 내보내고, 전후의 무게를 재면 $E=mc^2$을 통해 광자의 에너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방출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정밀하게 안다면 에너지–시간 불확정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보어는 상자의 무게를 재는 과정과 시계의 정확도를 함께 고려했다. 상자가 저울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면 중력 퍼텐셜이 달라지고,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라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도 불확정성이 생긴다. 세부 유도에는 주의가 필요하지만 장면의 핵심은 선명하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이론을 시험하려 만든 장치를 분석하는 데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사용되었다. 상대성이론이 양자적 측정의 논리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공격은 보어에게 더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다.

제5절. EPR — 질문의 재설계

솔베이 뒤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성 관계의 수학을 단순히 깨뜨리려는 방향에서 물러났다. 대신 양자역학이 자연에 대한 완전한 기술인지 물었다.

1935년 아인슈타인·보리스 포돌스키·네이선 로젠은 서로 상호작용한 뒤 멀리 떨어진 두 계를 논했다. 한쪽에서 무엇을 측정할지 선택한다고 해서 다른 쪽의 물리적 실재가 즉시 바뀌어서는 안 될 듯하다. 그렇다면 다른 쪽에는 파동함수가 한꺼번에 담지 못하는 더 많은 실재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닐까?

포돌스키가 실제 문장을 주로 작성했고 아인슈타인은 그 형식이 자신이 강조하려는 핵심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여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숨은 숫자 하나를 보태는 일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분리된 대상들이 각자 독립적인 실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보어는 같은 해 반박 논문을 냈다. 멀리 있는 입자에 기계적인 힘이 전달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물리량을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실험 조건 전체가 측정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다. 논쟁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얽힘을 이론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끌어냈다.

제6절. 벨 이후 — 자연의 뜻밖의 답

존 스튜어트 벨 초상

존 스튜어트 벨(1928–1990) —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실재와 국소성의 질문을 실험 가능한 부등식으로 바꾸었다.

1964년 존 벨은 일정한 국소성 조건과 보조 가정을 만족하는 이론이라면 얽힌 입자의 상관관계가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제시했다. 양자역학은 특정 상황에서 그 한계를 넘는다고 예측했다. 이후 여러 세대의 실험이 양자역학을 지지했고, 2015년 무렵에는 주요 실험적 허점을 동시에 크게 줄인 결과도 나왔다.

이를 “모든 실재가 사라졌다”거나 “정보가 빛보다 빠르게 이동한다”고 옮기는 것은 지나치다. 얽힘으로 통제 가능한 메시지를 초광속으로 보낼 수는 없다. 벨 실험이 강하게 제약하는 것은 특정한 의미의 국소적 숨은변수 설명이다.

자연은 아인슈타인이 기대한 방식으로 답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EPR이 없었다면 얽힘의 의미가 그토록 일찍 선명한 문제로 떠올랐을지 단정하기 어렵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대신 그 이론이 자기 뜻을 더 정확히 밝히도록 몰아붙였다. 그의 반론은 오늘날 양자암호·양자통신·양자계산이 이용하는 얽힘의 물리학으로 이어졌다.


제7절. 화해하지 않았으나 서로를 버리지도 않았다

논쟁의 역사를 결과만으로 정리하면 보어가 이기고 아인슈타인이 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실제 관계는 승패표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을 시대에 뒤처진 반대자로 취급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던진 사고실험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고, 수년 뒤에도 그 논쟁을 반복해서 설명했다. 1949년 아인슈타인의 일흔 번째 생일을 기념한 논문집에서 보어가 선택한 주제도 두 사람이 벌인 양자론 논쟁이었다.

그 글에는 보어가 광자 상자 장치를 그린 그림 앞에서 토론하는 유명한 사진이 실렸다. 칠판에는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상자가 놓여 있다. 사진 한 장을 우정의 완전한 증거로 과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보어가 그 논쟁을 자기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여겼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막스 보른과 아인슈타인의 관계도 비슷했다. 보른은 파동함수의 확률 해석을 제안한 핵심 인물이었고, 바로 그 해석은 아인슈타인이 가장 깊이 의심한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수십 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통계적 예측이 뛰어남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개별 사건의 실재를 완전히 기술한다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로 압축되는 문장도 이런 긴 우정의 대화 속에 놓아야 제 의미를 얻는다. 학회장에서 상대를 조롱한 구호라기보다 오랜 친구에게 자신의 자연관을 설명한 문장이었다.

슈뢰딩거 역시 단순한 중간자가 아니었다. 파동방정식을 세웠지만 파동함수를 오직 측정 확률의 도구로만 이해하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1935년 EPR을 읽은 뒤 ‘얽힘’을 뚜렷하게 명명하고, 거시적인 고양이가 삶과 죽음의 중첩에 놓이는 사고실험을 제시했다. 오늘날 고양이는 양자 신비의 상징처럼 쓰이지만, 원래의 목적에는 당시 해석을 거시세계까지 곧장 확대할 때 생기는 불편함을 드러내려는 뜻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문제 제기가 슈뢰딩거에게 또 다른 질문을 낳은 것이다.

파울 에렌페스트는 이 거인들을 인간적으로 이어 주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모두와 가까웠던 그는 새 양자역학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 추상성과 해석 문제 앞에서 큰 부담을 느꼈다. 그의 삶을 이 논쟁의 희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다만 당시 혁명이 모든 물리학자에게 통쾌한 승리의 행진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익숙한 자연의 그림이 무너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지적 문제인 동시에 인간적인 시련이었다.

이 관계들을 함께 보면 구도가 달라진다. 한쪽에는 늙고 완고한 아인슈타인, 다른 쪽에는 진보적인 승자들이 서 있던 것이 아니다. 보어는 그의 반론을 평생 품었고, 보른은 반대하는 친구와 대화를 멈추지 않았으며, 슈뢰딩거는 완성자이면서 비판자였다. 아인슈타인은 그들 모두에게 정답을 준 사람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이론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제3부 — 두 이론이 실제로 만난 곳

제1절. 원리와 위기

상대성이론은 몇 가지 넓은 원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탄생했다. 모든 관성계에서 물리법칙이 같다는 원리와 광속 불변을 함께 받아들이면 시간과 공간을 다시 정의해야 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자유낙하와 가속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등가원리가 중력을 시공간의 기하학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었다.

양자론은 흑체복사·광전효과·원자 스펙트럼·물질의 안정성처럼 고전물리학으로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응하며 자랐다. 그러나 이 대비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상대성이론도 당시의 구체적 물리 문제에서 떨어져 나온 순수 사색은 아니었고, 양자역학도 데이터에 끌려간 임시 규칙의 묶음은 아니었다. 두 이론 모두 논리와 경험이 함께 만든 결과였다.

제2절. 연속과 불연속이라는 표지판

일반상대성이론은 대체로 연속적인 시공간을 기본 무대로 삼는다. 양자역학에서는 원자의 에너지처럼 특정 물리량이 불연속적인 값만 가질 수 있다.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서 은 원자 빔이 자기장 속에서 갈라진 모습은 공간 양자화를 인상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22년의 슈테른과 게를라흐가 전자 스핀을 확인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스핀 개념은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고 당시에는 구양자론의 궤도 각운동량으로 해석했다. 은 원자의 갈라짐이 전자의 고유한 스핀과 관련된다는 현대적 설명은 이후에 정립되었다. 실험은 새 자연을 보여 주었지만 실험자들도 자신들이 정확히 무엇을 보았는지 즉시 알지는 못했다.

‘상대성은 연속, 양자는 불연속’은 첫 표지판일 뿐 마지막 결론이 아니다. 양자역학에도 연속적인 수학과 관측량이 있고, 양자중력은 오히려 시공간 자체가 양자화되는지 묻는다.

제3절. 디랙, 두 언어를 한 문장에 넣다

폴 디랙 초상

폴 디랙(1902–1984) —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하나의 전자 방정식에 결합해 반물질의 문을 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를 다루려면 상대론적 에너지 관계와 양자 파동을 함께 만족시켜야 했다. 1928년 폴 디랙은 두 요구를 결합한 전자 방정식을 제시했다. 방정식은 전자의 스핀을 자연스럽게 포함했고 음의 에너지 해를 품었다.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전자와 질량은 같지만 전하가 반대인 입자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1932년 양전자가 관측되면서 반물질은 수학의 부산물에서 자연의 구성원으로 들어왔다.

이 성공은 두 이론이 화해할 수 없다는 그림을 깨뜨린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결합은 가능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입자까지 예측했다.

제4절. 입자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세계

상대론적 세계에서는 에너지가 입자로 바뀌고 입자와 반입자가 다른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 입자의 수가 고정된 비상대론적 양자역학만으로는 이를 온전히 담기 어렵다. 물리학자들은 입자 하나의 파동함수보다 공간 전체에 퍼진 을 양자화했다. 전자기장의 들뜸이 광자로, 전자장의 들뜸이 전자와 양전자로 나타난다는 것이 양자장론의 기본 생각이다.

양자전기역학은 빛과 전자의 상호작용을 놀라운 정밀도로 설명하고, 강력과 약력을 포함하는 표준모형도 상대론적 양자장론의 언어로 세워졌다. 현대 입자물리학의 상당 부분은 상대성과 양자가 이미 성공적으로 만난 세계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장론이나 표준모형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수상대성이론, 질량–에너지 등가, 광양자라는 출발점을 마련했다. 후대 물리학은 그 출발점들을 그가 선택하지 않은 방식으로 결합해 더 멀리 나아갔다.


제4부 — 아직 만나지 못한 곳

제1절. 중력만은 왜 어려운가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양자장론에서 결합했다. 남은 큰 문제는 일반상대성이론, 곧 중력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시공간은 고정된 무대가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에 반응해 휘는 배우다. 보통의 양자장론은 이미 주어진 시공간 위에서 장의 요동을 계산한다. 무대 자체가 양자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두 설명의 전제가 충돌한다.

일상이나 태양계에서는 문제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블랙홀 중심 부근이나 우주의 매우 이른 시기처럼 엄청난 밀도와 작은 규모가 겹치면 중력과 양자를 동시에 무시할 수 없다.

제2절. 블랙홀에서 벌어진 충돌

1970년대 스티븐 호킹은 휘어진 시공간에서 양자장을 다루면 블랙홀이 열복사를 내보낼 수 있음을 보였다. 일반상대성이론의 블랙홀과 양자론의 입자 생성이 한 계산에서 만난 결과였다.

블랙홀이 복사를 내며 사라진다면 안으로 들어간 물질의 양자정보는 어떻게 되는가? 양자이론에서는 정보가 근본적으로 보존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단순한 반고전적 계산에서는 사라지는 듯 보인다. 이것이 블랙홀 정보 문제다.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모든 물리학자가 동의하는 완전한 양자중력 이론과 직접 검증이 확립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한 기둥이 틀렸다는 판결보다 둘의 경계를 넘는 더 넓은 언어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제3절. 마지막 꿈과 오늘의 거리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의 장으로 묶는 통일장이론을 탐구했다. 그가 택한 길은 현대의 표준 이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강력과 약력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고, 그는 양자역학의 통상적 형식을 근본 이론의 토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실패를 오늘의 지식으로 손쉽게 재단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가 현대적 양자중력을 거의 완성했다거나 초끈이론을 예견했다고 꾸밀 필요도 없다. 구체적 프로그램과 오늘의 연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질문의 방향은 이어진다. 자연의 힘들은 더 깊은 구조의 서로 다른 모습일 수 있는가? 물질과 시공간을 하나의 일관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초끈이론·고리양자중력과 여러 접근법이 이를 다루지만 어느 하나도 실험적으로 확정된 최종 이론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꿈은 완성된 유산보다 후대가 계속 고쳐 묻는 질문에 가깝다.


에필로그 — 틀린 답보다 위대한 질문

이 이야기를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맞서다가 패배했다”는 한 문장으로 끝내기는 쉽다. 벨 실험은 양자역학의 예측을 지지했고, 아인슈타인은 확률적 해석을 최종 자연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빛의 양자성을 가장 과감히 주장한 사람,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일찍 포착한 사람, 원자의 방출을 확률로 기술한 사람, 유도방출을 이론화한 사람, 보스의 통계를 알아보고 새로운 물질 상태를 예측한 사람도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리고 “이 계산은 실재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끝까지 물은 사람 역시 그였다.

보어도 단순한 승자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이 사고실험을 내놓을 때마다 그는 양자역학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주장하지 않는지 더 정교하게 말해야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관측의 한계를 수학으로 표현했고, 슈뢰딩거는 파동의 언어를 만들면서도 해석에 불편함을 느꼈다. 보른은 확률 해석을 제안했고, 디랙은 상대성과 양자를 결합해 반물질의 문을 열었다. 이들은 서로의 질문을 통해 더 멀리 갔다.

과학은 한 천재가 진리를 혼자 꺼내 놓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재능과 세대가 상대의 오류를 고치고 미완성의 생각을 이어받으며 좋은 질문을 더 정확한 실험으로 바꾸는 긴 대화다. 아인슈타인의 위대함은 언제나 옳았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틀릴 수 있는 질문도 모호한 불만으로 남겨 두지 않고 자연이 대답할 수 있는 형태로 밀어붙였다.

마지막 장면은 무덤 앞이 아니라 아직 불이 켜진 연구실이어야 한다. 칠판에는 시공간의 곡률과 양자 상태가 나란히 적혀 있고, 누군가는 두 식 사이의 빈칸을 바라본다.

자연은 서로 다른 법칙들의 우연한 모음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더 깊은 질서를 품고 있는가?

그가 얻은 모든 답이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열어 놓은 두 혁명과 그 사이에 남긴 질문은 아직 살아 있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한 번 더 묻는 용기, 우주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답할 때 그 낯선 대답을 다시 생각할 용기. 그것이 아인슈타인이 현대 물리학에 남긴 가장 인간적인 유산인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이 직접 말한 시공간과 에테르 — 1920년 강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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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및 참고 자료 길잡이

아인슈타인의 주요 저작

  • 1905, 「빛의 발생과 변환에 관한 발견법적 관점에 대하여」
  • 1905,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관하여」
  • 1909, 복사 에너지 요동 관련 논문과 강연
  • 1916~1917, 복사의 양자론 관련 논문 — A·B 계수
  • 1924~1925, 이상기체의 양자론 논문군
  • 1935, Einstein–Podolsky–Rosen,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다고 볼 수 있는가?」
  • 보른–아인슈타인 서한

인물·논쟁 및 후대 연구

  • Niels Bohr, 「Discussions with Einstein on Epistemological Problems in Atomic Physics」(1949)
  • Werner Heisenberg, Physics and Beyond — 후대 회고임을 전제로 활용
  •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 Max Jammer, The Philosophy of Quantum Mechanics
  • John S. Bell, 「On the Einstein Podolsky Rosen Paradox」(1964)
  • 벨 실험과 2022년 노벨 물리학상 공식 과학 해설
  • 보스–아인슈타인 응축과 2001년 노벨 물리학상 공식 해설
  •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의 당대 해석과 스핀에 의한 후대 재해석 연구

이 장의 인물

막스 플랑크 초상

막스 플랑크 Q01

1858–1947

흑체복사 공식 논문 (1900)

뜨거운 물체가 내는 빛의 분포를 설명하려 에너지가 진동수에 비례하는 불연속 단위로 교환된다고 제안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스스로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양자라는 개념을 세상에 내놓아, 젊은 아인슈타인이 빛의 본성 전체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닐스 보어 초상

닐스 보어 Q02

1885–1962

원자의 구성과 스펙트럼에 관한 논문 (1913); 상보성 강연 (1927)

전자가 불연속적인 궤도 사이를 옮겨 다니는 원자모형을 세우고, 훗날 상보성 개념으로 양자현상의 해석을 정교화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아인슈타인의 거듭된 사고실험에 응답하며 자신의 상보성 개념을 더 깊게 다듬어, 논쟁 자체를 양자역학 해석의 자산으로 남겼다.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 초상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 Q03

1894–1974

플랑크 복사 법칙을 새로운 통계로 유도한 논문 (1924)

다카 대학에서 광자를 세는 새로운 통계적 방법을 고안해 아인슈타인에게 보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아인슈타인이 그 방법을 질량을 가진 입자의 기체로 확장하도록 이끌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예측으로 이어졌다.

루이 드브로이 초상

루이 드브로이 Q04

1892–1987

「양자론 연구」(박사학위논문, 1924)

빛이 파동이자 입자라면 물질에도 파동성이 있을 수 있다는 대칭적인 발상을 제시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아인슈타인이 '큰 베일의 한 귀퉁이를 들어 올렸다'고 평가한 물질파의 개념을 남겨,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에르빈 슈뢰딩거 초상

에르빈 슈뢰딩거 Q05

1887–1961

파동역학 관련 논문들 (1926)

드브로이의 물질파를 지배하는 파동방정식을 찾아내 파동역학을 완성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파동함수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불편함을 남겨, 후일 얽힘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이어질 질문을 던졌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초상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Q06

1901–1976

행렬역학 논문 (1925); 불확정성 관계 논문 (1927)

관측 가능한 양만으로 원자를 기술하는 행렬역학을 세우고,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불확정성원리를 제시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무엇을 '관측'이라 부를 수 있는지 자체가 이론에 의해 결정된다는 아인슈타인의 반문을 불러일으켜, 양자역학 해석 논쟁의 핵심 물음을 남겼다.

막스 보른 초상

막스 보른 Q07

1882–1970

파동함수의 확률 해석에 관한 논문 (1926)

슈뢰딩거의 파동함수가 측정 결과의 확률을 나타낸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아인슈타인이 평생 편지로 논쟁하면서도 우정을 이어 간 확률적 자연관을 물리학의 중심에 놓았다.

폴 디랙 초상

폴 디랙 Q08

1902–1984

전자의 상대론적 파동방정식 논문 (1928)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요구를 함께 만족시키는 전자 방정식을 세워 스핀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방정식 속 음의 에너지 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반물질의 가능성을 남겨, 1932년 양전자 관측으로 이어졌다.

존 스튜어트 벨 초상

존 스튜어트 벨 Q09

1928–1990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역설에 관하여」(1964)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을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 부등식을 제시해, 철학적 논쟁을 실험물리학의 질문으로 바꾸었다.

다음 단계에 건넨 것
얽힘이 이론의 주변부가 아니라 자연의 실제 성질임을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을 남겨, 오늘날 양자정보과학으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 원전 — 에테르와 상대성이론 3-04

Äther und Relativitätstheorie · 1920 · 라이덴 대학 강연, 1920년 5월 5일

일반상대성이론의 시공간을 새로운 의미의 '에테르'로 재해석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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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 심화

빛은 파동인가, 아니면 에너지 덩어리(양자)인가?

$$ E = h\nu $$

E — 빛 양자(광자) 하나의 에너지 / h — 플랑크 상수 / ν — 빛의 진동수

1905년 아인슈타인은 빛이 진동수에 비례하는 에너지를 가진 알갱이(광양자)로도 행동한다고 제안했다. 같은 해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이, 동시에 양자역학의 토대 하나를 놓은 셈이다.

적용 한계 — 이 식은 빛의 입자적 측면만을 나타낸다. 이중슬릿 실험이 보여 주듯 빛(그리고 전자 같은 물질)은 상황에 따라 파동으로도, 입자로도 행동한다 — 이 이중성이 이 장 전체의 긴장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