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제13장 부록 — 드라마와 전기로 보는 아인슈타인

예상 읽기 시간 약 73분

1부 드라마

상영 안내
이 장에는 복잡한 수식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수식은 단 하나, (E=mc^2)입니다. 대신 나침반 한 개, 바이올린 한 대, 특허청 서랍 하나, 잘 뚫어지는 양말 몇 켤레와 방향 감각이 썩 좋지 않은 작은 범선이 등장합니다.

이 글은 공개 기록과 편지, 회고록, 학술 전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다. 인물들이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을 대사로 만들지 않는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말은 ‘기록의 목소리’로, 당시 정황을 보여 주는 최소한의 장면 묘사는 ‘재연’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세부가 불확실한 일화는 ‘기록 확인’으로 구분한다.

자, 객석의 불을 낮추자. 영화는 대학 연구실이 아니라 관공서에서 시작한다.


프롤로그 — 서랍 안의 우주

장면 1. 베른, 스위스 특허청 · 1905년

[화면] 기다란 복도. 문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다. 발명가들의 꿈이 도면과 설명서에 갇혀 차례를 기다리는 곳이다.

카메라가 한 사무실로 들어간다. 책상 위에는 전기장치 특허 서류가 쌓여 있다. 젊은 심사관 한 사람이 출원서의 허점을 찾다가, 슬쩍 다른 종이에 계산을 적는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종이는 서랍으로 들어간다. 서랍이 닫힌다.

[진행자] 인류의 시공간 혁명은 잠시 업무시간 이후로 연기된다.

이 남자의 직함은 ‘천재 물리학자’가 아니다. 스위스 특허청 3급 기술 심사관이다. 대학에는 그의 책상도, 조교 자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특허청 책상 한구석을 빌려 우주를 다시 설계하고 있었다.

그는 훗날 이곳을 ‘세속적인 수도원’처럼 회고했다. 생계를 해결하면서도 생각은 비교적 자유로운 곳. 사무실 서랍 속 개인 연구를 동료들과 장난스럽게 ‘이론물리학과’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을 처음부터 서른 살 가까운 청년으로 만나면 조금 섭섭하다. 필름을 되감자. 화면이 흔들리고, 숫자가 거꾸로 달린다.

[자막] 1905 → 1879


1부. 나침반을 든 아이

장면 2. 울름 · 1879년 3월 14일

헤르만과 파울리네 아인슈타인 부부의 첫아이가 태어난다. 집안에는 아기의 머리가 유난히 크고 각져 보여 어른들이 잠시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남았다. 머리 모양은 곧 평범해졌다.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여동생 마야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알베르트는 문장을 입 밖에 내기 전에 속으로 몇 번씩 완성해 보곤 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히 연습한 다음에야 말했다. 집안의 한 가정부가 아이의 발달을 걱정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진행자] 훗날 세계가 이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쩔쩔매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시작부터 묘한 대칭이다. 먼저 말을 아낀 쪽은 아인슈타인이었다.

장면 3. 뮌헨의 병상 · 다섯 살 무렵

주머니 나침반을 들여다보는 어린 아인슈타인

보이지 않는 힘이 바늘을 움직인다는 사실은 아이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소품 클로즈업] 작은 휴대용 나침반.

병으로 누워 있던 아이에게 아버지가 심심풀이로 나침반을 건넨다. 아이가 몸을 돌린다. 나침반도 돌아간다. 그러나 바늘은 고집스럽게 같은 방향을 찾는다.

손가락이 건드리지 않았는데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이때 사물 뒤에 깊이 숨어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자전적 기록에 남겼다. 그는 그것을 ‘경이감’으로 기억했다.

[진행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인다. 다섯 살 아이는 답을 얻지 못했다. 대신 평생 써도 모자랄 질문을 얻었다.

장면 4. 이름 모를 동물 사냥

삼촌 야콥은 조카에게 대수학을 가르치며 미지수를 이름 모를 작은 동물에 비유했다고 한다. 일단 그 녀석을 (x)라고 부르고, 붙잡은 뒤 진짜 이름을 알아내자는 것이다.

화면 속 소년은 공책 위로 몸을 숙인다. 대수학은 벌을 받는 시간이 아니라 사냥이 된다.

막스 탈메이라는 의대생은 매주 가족의 식탁을 찾아와 과학책과 철학책을 건넨다. 소년은 유클리드 기하학 책을 붙들고 황홀해한다. 훗날 그는 그 책을 ‘성스러운 기하학 소책자’라고 불렀다.

바이올린도 등장한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시켜서 배웠다. 얼마 뒤 모차르트를 만나자 태도가 달라졌다. 이 악기는 평생, 계산이 막힐 때마다 다른 길로 생각하게 해 주는 동료가 된다.

장면 5. 교실과 탈출

뮌헨의 김나지움은 암기와 규율을 중시했다. 아인슈타인은 교사들을 하사관에 비유할 만큼 이 분위기를 싫어했다. 집에서는 보이지 않는 힘과 기하학을 쫓는데, 학교에서는 정답의 순서와 복종을 먼저 요구했다.

1894년 가족이 사업 문제로 이탈리아로 옮겨 가자 열다섯 살 알베르트만 뮌헨에 남는다. 오래 버티지 않는다. 의사의 진단서를 구하고 학교를 떠나 가족을 따라간다.

[화면 정지] 교문 밖으로 나가는 소년.

[진행자] 학교는 학생을 잃었다. 물리학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출생, 뮌헨 이주, 헤르만과 야콥의 사업, 루이트폴트 김나지움과 막스 탈메이: 아브라함 파이스의 Subtle is the Lord와 필립 프랑크의 Einstein: His Life and Times.
  • 말이 늦고 문장을 미리 되뇌었다는 기억: 파이스가 인용한 여동생 마야 아인슈타인의 전기 스케치.
  • 나침반과 ‘경이감’: 아인슈타인 본인의 「자전적 노트」(1949). 이 부에서 가장 확실한 1차 회고다.
  • 삼촌 야콥의 ‘대수학 사냥’: 여러 인터뷰와 전기에 반복되지만 최초 기록은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장면에서도 ‘비유했다고 한다’고 표현했다.

2부. 낙방생, 연인, 무직자

장면 6. 취리히 공과대학 입학시험 · 1895년

열여섯 살의 아인슈타인이 시험지를 낸다.

수학과 물리: 놀라움.
프랑스어와 화학과 생물학: 다른 의미의 놀라움.

그는 낙방한다. 다만 학교 측은 이 이상한 낙방생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 스위스 아라우의 학교에서 1년 더 공부한 뒤 다시 오라고 권한다. 아라우의 교육은 뮌헨과 달랐다. 외우기보다 묻고 생각하게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시기를 가장 행복한 학창 시절 가운데 하나로 기억했다.

이듬해 그는 입학한다. 한 번의 실패가 진로를 막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학교로 가는 우회로가 된 셈이다.

장면 7. 강의실 한쪽의 밀레바

학생 시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젊은 아인슈타인

수학이 막히면 음악이 생각의 호흡을 되돌려 주었다.

1896년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물리학 교사 과정의 유일한 여학생 밀레바 마리치가 있다. 세르비아 출신으로 수학과 물리학에 깊은 관심을 품은 학생이다.

두 사람은 책과 논문을 읽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편지에는 연애와 물리학이 한 문장 안에서 자주 만난다. ‘우리의 상대운동에 관한 연구’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기록 확인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의 초기 연구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편지는 두 사람이 물리학을 함께 토론했음을 보여 주지만, 공동 저작자로 단정할 충분한 증거는 없다. 이 전기는 그녀를 지우지도, 확인되지 않은 공저자로 만들지도 않는다.

담당 교수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강의를 자주 빠지고 혼자 원전을 읽는 아인슈타인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를 ‘게으른 개’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진행자] 몇 년 뒤 그 ‘게으른 개’의 이론은 민코프스키의 수학을 만나 ‘시공간’이라는 우아한 집으로 들어간다. 역사는 가끔 농담을 아주 천천히 완성한다.

장면 8. 졸업, 그리고 빈 의자

1900년 졸업. 동급생들에게는 조교 자리가 생기지만 아인슈타인에게 돌아오는 의자는 없다. 추천을 청하는 편지는 계속 나가고, 정중한 거절과 침묵이 돌아온다. 가정교사와 임시직이 이어진다.

밀레바와의 사이에서는 딸 리제를이 태어난다. 아이의 이후 삶은 기록이 끊겨 오늘날까지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는 카메라도 함부로 빈칸을 채우지 않는다.

그때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의 아버지가 특허청장에게 아인슈타인을 추천한다.

[자막] 다음 장면: 우주가 3급 심사관을 채용하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밀라노 이주, 학교 이탈, ETH 낙방, 아라우 유학, 국적 포기와 스위스 시민권: 파이스와 프랑크의 표준 연대기.
  • 밀레바 마리치와의 교류 및 ‘상대운동’ 표현: Jürgen Renn과 Robert Schulmann이 편집한 Albert Einstein/Mileva Marić: The Love Letters.
  • 밀레바의 과학적 기여 정도는 학계의 논쟁이 계속되는 사안이다. 편지로 확인되는 공동 토론과 입증되지 않은 공동 저작 주장을 구분했다.
  • 민코프스키의 ‘게으른 개’: 물리학사에 널리 반복되지만 최초 증언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 올림피아 아카데미: 회원 모리스 솔로빈의 서한과 회고, Lettres à Maurice Solovine(1956).

3부. 특허청의 비밀학과

장면 9. 면접

특허 도면을 검토하는 젊은 아인슈타인

특허청의 도면과 기계 장치는 생각을 실제 작동 방식으로 번역하는 훈련장이 되었다.

채용 조건은 기계공학 학위였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없었다. 특허청장 프리드리히 할러는 그래도 이 젊은이를 직접 시험해 본다. 1902년 6월, 그는 3급 기술 심사관으로 채용된다.

하루 여덟 시간, 아인슈타인은 전기기계의 설명을 읽고 발명가들이 숨겨 놓은 논리의 빈틈을 찾아낸다. 애매한 말을 지우고, 장치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머릿속에서 다시 세운다.

[진행자] 나쁜 훈련이 아니었다. 몇 년 뒤 그는 시간과 공간에 제출된 인류의 오래된 특허 명세서를 같은 방식으로 심사하게 된다.

장면 10. 올림피아 아카데미

저녁이면 모리스 솔로빈, 콘라트 하비히트와 책을 읽는다. 이름은 거창하게 ‘올림피아 아카데미’. 건물도, 교수도, 학위도 없다. 값싼 소시지와 치즈, 흄과 스피노자와 푸앵카레, 그리고 끝날 줄 모르는 토론이 있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과장된 직함을 붙이고 진지한 철학을 장난스럽게 다룬다. 공식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의 진짜 대학원이 식탁 위에 세워진다.

장면 11. 너무 짧은 박사논문

아인슈타인은 분자 크기를 다룬 논문을 취리히 대학에 제출한다. 논문이 너무 짧아 보인다는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논지를 부풀리는 대신 약간 손질해 다시 낸다. 1905년, 박사학위를 받는다.

[진행자] 우주의 크기를 재는 데는 대담했던 사람이 논문의 길이를 재는 대학 규정 앞에서는 뜻밖에 실용적이었다.

그리고 그해, 특허청 우편함과 학술지 편집부 사이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시작된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졸업 뒤 실업과 리제를의 출생: 아인슈타인–밀레바 연애편지집과 파이스.
  • 그로스만 집안의 추천, 특허청장 프리드리히 할러와 채용 과정: 스위스 지적재산청(IGE)의 기관 역사 ‘Einstein’ 항목.
  • ‘세속적인 수도원’: 아인슈타인의 후일 회고를 인용한 파이스와 프랑크.
  • 박사논문이 너무 짧았다는 일화는 여러 전기에 반복되지만 정확한 1차 출처는 확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구체적인 대화를 만들지 않았다.

4부. 1905년, 논문이 줄을 서다

장면 12. 네 번의 투고

1905년 책상에서 홀로 논문을 쓰는 아인슈타인

1905년의 조용한 책상에서 빛·원자·시간·에너지가 차례로 새 이름을 얻었다.

[화면] 달력이 빠르게 넘어간다.

3월. 빛은 파동이면서 낱알처럼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논문.
봄. 브라운 운동을 통해 원자와 분자의 실재를 시험하는 논문.
6월.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 곧 특수상대성이론.
9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밝힌 짧은 후속 논문.

마지막 논문의 결론은 훗날 한 줄로 기억된다.

$$E=mc^2$$

오늘날에는 네 논문 모두 한 사람이 한 해에 썼다는 사실이 전설처럼 보인다. 당시 학계의 반응은 의외로 조용했다. 저자는 대학 교수도 유명 연구소 직원도 아니었다.

그러나 막스 플랑크가 논문을 알아본다. 젊은 물리학자 막스 폰 라우에는 저자를 만나려고 베른을 찾아온다. 나이 지긋한 교수를 예상했던 그가 젊은 아인슈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진행자] 세상을 바꾼 이론의 저자가, 그 이론을 읽고 찾아온 사람에게도 저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명이라는 위장은 꽤 완벽했다.

장면 13. 바이올린 휴식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을 든다. 방을 서성이며 모차르트를 연주하다가 문득 악기를 내려놓고 계산대로 돌아오곤 했다고 지인들은 회고했다.

음악은 취미만이 아니었다. 논리가 막힌 곳에서 형태와 조화를 다시 듣는 방법이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같은 선율이 몇 차례 더 돌아올 것이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1905년 논문들의 발표 순서와 과학적 내용, 막스 플랑크의 초기 평가: 파이스와 표준 과학사.
  • 막스 폰 라우에가 젊은 아인슈타인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장면: 파이스와 여러 전기에 반복된다. 만남의 정황은 신뢰할 만하지만 세부 대화는 판본마다 다르므로 재현하지 않았다.
  • 바이올린이 삶의 큰 기쁨이었다는 발언과 물리학자가 아니었다면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표현은 1929년 무렵 언론 인터뷰들에 반복된다. 이 원고에서는 정확한 문장으로 직접 인용하지 않고 지인들의 회고와 함께 서술했다.

5부. 교수의 문은 열리고, 집의 문은 닫히고

장면 14. 특허청 책상 위의 거위

1908년 베른 대학의 무급 강사, 1909년 취리히 대학 교수, 1911년 프라하, 1912년 다시 취리히. 학계의 문이 뒤늦게 열린다.

특허청을 떠나는 날 동료들이 그의 책상에 커다란 거위 모형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공식적인 작별식보다 이런 장난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강의는 언제나 성공적이지 않았다. 원고 없이 설명하다가 자신도 길을 잃곤 했다는 학생들의 회고가 있다. 우주의 길은 찾았지만 칠판 위 강의의 귀환 경로는 가끔 놓쳤다.

장면 15. 베를린 · 1914년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가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를 부른다. 밀레바와 두 아들도 베를린으로 오지만 이미 깊어진 균열은 봉합되지 않는다. 몇 달 뒤 밀레바는 아이들과 취리히로 돌아간다.

이 장면에는 가벼운 음악이 없다. 젊은 시절 물리학을 함께 이야기했던 두 사람의 삶은 가사노동, 경력의 불균형, 감정적 상처와 갈등 속에서 갈라진다. 훗날 두 사람은 이혼한다.

같은 여름, 유럽에서는 전쟁이 시작된다. 독일 지식인 다수가 전쟁을 지지하는 성명에 서명할 때 아인슈타인은 거부하고 반전 성명에 참여한다.

집은 무너지고 대륙은 전쟁에 들어간다. 그 한가운데에서 그는 중력을 다시 쓴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베른·취리히·프라하·베를린의 교수직 이동: 파이스의 연대기.
  • 특허청 퇴직 날의 거위 모형: 두카스·호프만 계열 전기에 전하지만 최초 증언자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 밀레바와의 불화와 별거: 아인슈타인–밀레바 연애편지집과 파이스. 가족사의 고통을 희화화하지 않는다는 편집 원칙을 적용했다.
  • 제1차 세계대전기의 반전 입장: 당시 성명과 표준 전기 기록.

6부. 매주 목요일, 우주가 수정되다

장면 16. 베를린 · 1915년 11월

칠판 앞에서 장방정식을 고쳐 쓰는 아인슈타인

1915년 11월의 네 목요일, 그는 매주 자신의 우주를 고쳐 세웠다.

[자막] 목요일.

아인슈타인이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 앞에 선다. 방정식을 발표한다.

[자막] 다음 목요일.

그가 다시 나타난다. 지난주 방정식을 고쳤다.

[자막] 또 다음 목요일.

다시 고쳤다.

네 번의 목요일 동안 그는 거의 먹고 자는 일을 잊은 채 이론을 밀어붙인다. 괴팅겐에서는 다비트 힐베르트가 같은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고, 자극하고, 오해하고, 다시 관계를 수습한다.

마침내 11월 25일, 오늘날 일반상대성이론의 장방정식으로 이어지는 형태가 제시된다.

[진행자] 천재의 작업은 처음부터 완벽한 답을 받아 적는 일이 아니었다. 목요일마다 자기 답을 의심하고, 버리고, 다시 들고 오는 일이었다.

장면 17. 아직 받지 않은 노벨상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을 돌본 사람은 사촌 엘자였다. 밀레바와의 이혼이 마무리된 1919년 두 사람은 결혼한다.

이혼 합의에는 특이한 조항이 들어간다. 아인슈타인이 장차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을 밀레바에게 넘긴다는 약속이다. 아직 받지 않은 상금이 가족의 미래를 담보한다. 1922년 수상이 확정되자 약속은 이행된다.

장면 18. 하늘의 판정

개기일식 관측을 준비하는 천문학자들

1919년 개기일식의 짧은 어둠 속에서 별빛은 방정식의 운명을 시험했다.

1919년 5월 29일, 개기일식. 영국 관측대가 프린시페와 소브랄에서 태양 가까이 보이는 별의 위치를 촬영한다. 별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 얼마나 휘는지 재려는 것이다.

결과를 알리는 소식이 도착한다. 제자 일제 로젠탈슈나이더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가 결과가 반대였다면 어쩔 뻔했느냐고 묻자 아인슈타인은 하느님이 곤란했을 것이며 이론은 옳다는 취지로 답했다.

기록의 목소리 — 회고에 전해진 답변
“그랬다면 하느님이 안되셨겠지요. 이론은 어차피 옳으니까요.”

자신감인가, 오만인가, 농담인가. 아마 셋이 조금씩 섞였을 것이다.

장면 19. 신문 편집국의 비상

런던의 신문사. 뉴턴의 이름이 적힌 원고가 책상 위에 놓인다. 그 옆에는 ‘상대성’이라는 낯선 단어가 놓인다. 기자들은 검증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만 무엇이 검증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더 큰 문제를 발견한다.

《타임스》는 과학의 혁명을 알린다. 《뉴욕 타임스》는 하늘의 빛이 온통 삐뚤어졌다고 쓴다.

하룻밤 사이, 특허청 출신 교수의 얼굴이 세계 신문 1면에 등장한다. 강연 요청, 팬레터, 질문, 청혼 편지까지 쏟아진다.

중요한 사실 하나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전쟁 직후 영국 과학자들이 독일에서 태어난 이론을 시험했다. 이 사건은 과학적 검증이면서 갈라진 유럽에서 협력이 다시 가능하다는 상징이 되었다.

기록 확인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세 명뿐이라는 질문에 에딩턴이 “세 번째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널리 전하지만 정확한 대화 기록은 확인하기 어렵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당시 대중이 느낀 난해함을 압축한 훌륭한 시대의 농담이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1915년 11월 네 차례 강연과 힐베르트와의 관계: 파이스. 우선권 문제의 균형 잡힌 해석에는 Tilman Sauer의 1998년 연구도 참고한다.
  • 엘자와의 재혼 및 이혼 합의의 노벨상금 조항: 관련 문서와 전기, Maria Popova의 정리 및 einstein-website.de의 상금 추적 자료.
  • 1919년 일식 관측과 언론 반응: 당시 관측 보고, Smithsonian Magazine의 100주년 기사, Sky & Telescope의 ‘Lights All Askew’ 역사 기사.
  • “하느님이 안되셨겠지요”: 제자 일제 로젠탈슈나이더의 Reality and Scientific Truth(1980)에 실린 회고.
  • 헬렌 두카스의 1928년 비서 합류: 두카스·호프만과 표준 전기.
  • 에딩턴의 ‘세 번째 사람’: 정확한 1차 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기록 확인’으로 격리했다.

7부. 상대성이론보다 유명해진 남자

장면 20. 노벨상 수상자가 배에 없다

1922년, 노벨위원회는 보류했던 1921년도 물리학상을 아인슈타인에게 수여한다고 발표한다. 수상 이유는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광전효과의 법칙이었다. 위원회는 상대성이론을 둘러싼 논쟁을 조심스러워했다.

정작 수상자는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있었다. 그는 일정을 취소해 스톡홀름으로 달려가지 않고 여행을 계속한다. 시상식의 주인공이 시상식에 없다.

일본에서는 긴 강연을 들으려는 청중이 몰린다. 통역까지 거치면 강연은 더욱 길어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리를 지킨다. 이해의 정도와 환대의 크기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았다.

장면 21. 아인슈타인과 채플린

1931년 할리우드, 영화 《시티 라이트》 시사회. 찰리 채플린과 아인슈타인이 함께 나타나자 군중이 환호한다.

채플린은 훗날 자서전에 이 장면과 자신의 말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채플린을 모두 이해하기 때문에 환호하고, 아인슈타인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환호한다는 취지였다.

[화면] 두 사람이 웃는다.

[진행자] 한 사람은 말없이 세계를 웃겼고, 다른 사람은 방정식으로 세계를 침묵시켰다. 둘 다 당대 최고의 무성영화 배우처럼 군중 앞에 섰다.

장면 22. 대서양 위의 개인 교습

아인슈타인은 하임 바이츠만과 함께 히브리 대학 기금을 모으러 미국으로 향한다. 바이츠만의 회고에 따르면 항해 중 아인슈타인은 날마다 상대성이론을 설명한다.

뉴욕에 도착할 무렵 바이츠만이 얻은 결론은 자신이 이론을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이 정말 이 이론을 이해한다는 확신이었다.

[진행자] 개인 교습, 대서양 횡단, 최고의 강사. 그래도 수강생의 정직한 최종 평가는 ‘선생님은 아시는 것 같다’였다.

명성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와 유대인 공동체 지원에 참여한다. 그러나 유럽의 정치가 어두워질수록 평화에 대한 그의 확신도 더 어려운 시험을 맞는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노벨상 발표 시점, 수상 사유와 1922년 보어의 동시 발표: 노벨상 공식 기록.
  • 일본 순회 중 수상 소식을 접한 경위: 파이스와 당시 여행 연대기.
  • 채플린의 시사회 발언: Charles Chaplin, My Autobiography(1964). 채플린 본인의 회고라는 점에서 비교적 근거가 분명하다.
  • 바이츠만과의 미국행 및 ‘아인슈타인이 이해한다는 확신’: Chaim Weizmann, Trial and Error(1949).
  • ‘뜨거운 난로와 아름다운 여성’ 비유는 이 원고에서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Quote Investigator가 최초 전승을 추적했지만 아인슈타인의 확정 발언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8부. 보어와 끝나지 않는 경기

장면 23. 솔베이 회의 · 1927년

회의장에서 양자역학을 토론하는 아인슈타인과 동료 물리학자들

주사위는 농담이 아니라 자연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긴 논쟁의 상징이었다.

아침,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사고실험을 꺼낸다. 양자역학의 확률 해석에 빈틈이 있다는 도전이다.

보어는 하루 종일 생각한다. 저녁, 반박을 들고 돌아온다.

다음 날 아침, 아인슈타인이 또 다른 문제를 꺼낸다.

[진행자] 학술회의라기보다 지적 권투 경기다. 차이가 있다면 두 선수 모두 상대가 쓰러지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정확한 질문이 살아남기를 바랐다.

1926년 아인슈타인은 막스 보른에게 자연의 법칙이 확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불만을 적었다.

기록의 목소리 — 보른에게 보낸 편지
“적어도 나는 확신합니다. 그분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보어와 양자역학의 지지자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1935년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은 양자역학이 실재를 완전하게 기술하는지 묻는 EPR 논문을 발표한다. 훗날 실험은 아인슈타인이 불편해한 양자 얽힘의 예측을 지지한다.

그렇다고 이 논쟁이 무익했던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집요하게 던진 질문은 양자이론이 무엇을 말하는지 더 엄밀하게 만들었고, 훗날 양자정보과학으로 이어졌다.

[화면 정지] 함께 걷는 아인슈타인과 보어.

두 사람은 이론 앞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존중했다. 좋은 논쟁은 상대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질문을 오래 살려 두는 기술이었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그분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1926년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 The Born–Einstein Letters.
  • 솔베이 회의에서 이어진 논쟁: 파이스와 표준 물리학사.
  • EPR 논문: A. Einstein, B. Podolsky, N. Rosen,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ical Review 47 (1935), 777–780.
  • ‘유령 같은 원격작용’: 1947년 보른에게 보낸 편지.
  • 벨 부등식 검증의 역사적 의미: 현대 양자물리학사와 2022년 노벨 물리학상 공식 해설. 후대 실험의 결론을 아인슈타인 생전의 판단처럼 소급하지 않았다.

9부. 돌아갈 나라가 사라지다

장면 24. 캘리포니아 · 1933년 1월

기차에 오르는 망명길의 남녀

1933년, 여행은 귀환을 전제로 하지 않는 망명의 길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된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독일에서는 그의 집과 별장이 수색당하고 재산이 몰수된다. 책은 불태워진다. 나치 선전은 카푸트 별장에서 발견한 평범한 식칼까지 위험한 무기처럼 떠벌린다.

[진행자] 우주를 휘게 만든 혐의를 찾지 못한 정권은 부엌칼을 증거로 내놓았다.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장면이다. 우스꽝스러움은 폭력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시민권을 포기한다. 벨기에에서는 신변 위협 때문에 경호를 받는다. 영국 노퍽의 외딴 오두막에서는 무장 경호원들과 함께 지낸다. 흐트러진 머리의 물리학자 옆에 총을 든 경호원들이 선 사진은 시대의 초현실적인 긴장을 그대로 남긴다.

1933년 10월, 그는 대서양을 건넌다. 다시는 유럽 땅을 밟지 않는다.

[화면] 배가 멀어진다. 바이올린 선율이 아주 작게 들린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발터 라테나우 암살과 아인슈타인에 대한 위협: 파이스와 프랑크.
  • 히틀러 집권 당시 캘리포니아 체류, 귀국 포기와 시민권 포기: 미국 홀로코스트기념관의 신문 아카이브와 Shapell Manuscript Foundation의 문서 해설.
  • 카푸트 별장 수색과 식칼 압수: 여러 전기에 반복되지만 세부 표현은 판본마다 다르다. 핵심 사건만 남기고 선전 문구를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 영국 노퍽 체류와 무장 경호원 사진: 당대 보도사진과 표준 전기.

10부. 프린스턴의 양말 없는 현자

장면 25. 머리카락, 스웨터, 구두

프린스턴 거리를 걷는 아인슈타인

프린스턴의 거리에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이 무색할 만큼 소박한 행인처럼 걸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강의 의무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곳에서 20여 년을 보낸다.

화면에 익숙한 모습이 나타난다. 헝클어진 백발, 늘어난 스웨터, 양말 없이 신은 구두.

양말을 신지 않는 이유를 묻자 엄지발가락이 결국 구멍을 내는데 왜 신느냐는 취지로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책갈피로 끼워 둔 수표를 잊어버렸다는 회고도 있다.

기록 확인
자기 집 주소를 잊어 연구소에 전화했다는 일화는 여러 형태로 전해지지만 확실한 1차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이 장면은 사실로 단정하기보다 ‘프린스턴에 전해진 이야기’로만 소개한다.

장면 26. 산수 숙제

이웃 소녀가 산수 문제를 들고 찾아온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집을 동네 공부방처럼 이용한 셈이다. 어머니가 뒤늦게 알고 사과하자 아인슈타인은 자신도 아이에게서 얻는 것이 있다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행자]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든 사람이 초등 산수의 정답까지 늘 즉시 알았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숙제를 들고 다시 찾아올 만큼 친절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장면 27. 바람을 읽지 못한 남자

작은 목선을 타고 항해하는 아인슈타인

바람을 능숙하게 읽지는 못해도, 그는 생각을 풀어 놓기 위해 자주 물 위로 나갔다.

여름이면 그는 작은 범선을 탄다. 수영은 서툴고 항해 실력도 뛰어나지 않다. 배가 뒤집히거나 바람이 멎어 구조를 기다리는 일이 있었다고 지인들은 회고한다.

[화면] 돛은 축 늘어져 있다.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선장은 태연하다.

[진행자] 시공간의 곡률을 계산한 남자가 눈앞의 바람 방향에는 번번이 졌다. 우주는 종이 위에서 더 협조적이었다.

장면 28. 괴델의 시민권 시험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은 아인슈타인의 가까운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연구소에서 집까지 함께 걸으며 대화한다.

1947년 괴델은 미국 시민권 시험을 준비하다가 헌법 안에서 독재가 가능해지는 논리적 허점을 발견했다고 확신한다. 시험관에게 반드시 설명하려 한다. 아인슈타인과 동행한 친구들은 그 말만은 꺼내지 않도록 애쓴다.

법정에 도착한다. 판사가 질문한다. 괴델이 문제의 설명을 시작하려 한다. 판사는 화제를 돌리고 시험은 무사히 끝난다.

[진행자] 천재 세 사람이 모였고, 그날의 공동 연구 목표는 단 하나였다. 괴델이 헌법을 너무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

장면 29. 닫힌 연구실

대중이 사랑한 노년의 현자 뒤에서 아인슈타인은 통일장이론에 매달린다.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의 원리로 묶으려는 시도다. 물리학의 중심은 양자역학과 핵물리학으로 이동했고 많은 동료는 그의 연구가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멈추지 않는다. 성공이 보장되어서가 아니라 질문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그늘도 남는다. 큰아들 한스 알베르트와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며 회복되지만, 정신질환으로 스위스 요양원에서 지낸 작은아들 에두아르트와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천천히 멀어진다. 세계적 명성도 한 아버지의 무력감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고등연구소 합류, 엘자의 죽음, 여동생 마야와 비서 헬렌 두카스의 생활: 두카스·호프만과 파이스.
  • 옷차림과 양말: 두카스·호프만. 주소를 잊고 전화했다는 이야기는 프린스턴 지역의 여러 판본만 남아 있어 ‘기록 확인’으로 표시했다.
  • 항해 실력: Roger Highfield와 Paul Carter의 The Private Lives of Albert Einstein(1993) 계열 전기.
  • 이웃 소녀의 숙제: Princeton Alumni Weekly, “The Gentle Touch of Genius.”
  • 괴델과의 우정 및 시민권 시험: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룬 전기 자료와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의 정리 기사.
  • 한스 알베르트와 에두아르트: Highfield와 Carter. 가족의 의료·정서적 고통은 사실 설명에 필요한 범위에서만 다뤘다.

11부. 한 장의 서명과 천사백 쪽의 감시

장면 30. 롱아일랜드의 여름 별장 · 1939년

레오 실라르드가 찾아온다. 나치 독일이 핵분열을 무기에 이용할 가능성을 걱정한다.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한다. 미국이 관련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 뒤에는 핵무기 통제와 평화운동에 나선다. 편지에 서명한 일을 큰 실수라고 말했다는 증언은 라이너스 폴링의 회고를 통해 전한다.

[진행자] (E=mc^2)가 곧 원자폭탄의 설계도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과 과학이 핵시대의 상징이 된 이상, 그는 책임이라는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장면 31. 위험인물의 우편함

전쟁 뒤 아인슈타인은 핵군비 경쟁을 경고하고 세계정부를 주장한다. 미국의 인종차별을 ‘백인의 병’이라고 비판하며 흑인 지식인과 인권운동가들을 지지한다.

매카시즘이 번질 때 의회 조사에 불려간 교사와 지식인들에게 양심에 따라 협조를 거부하라는 취지의 조언도 한다. FBI는 오랫동안 그를 감시한다. 훗날 공개된 파일은 1,400쪽이 넘는다.

[화면] 두꺼운 서류 더미가 책상 위에 쌓인다.

[진행자] 이 많은 종이에서 스파이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노인이 편지를 아주 많이 썼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되었다.

장면 32. 대통령직을 거절하다

1952년 이스라엘 정부가 아인슈타인에게 대통령직을 제안한다. 그는 사람을 다루는 데 필요한 능력과 경험이 자신에게 없다는 취지로 정중히 거절한다.

[진행자] 우주를 다루어 본 경력은 국가원수 지원 자격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본인이 인정하지 않았다.

장면 33. 어린이와 고양이에게

어린이의 편지에 답장을 쓰는 아인슈타인

그는 거대한 우주를 논하면서도 어린 독자의 질문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우편함에는 거대한 정치 문제만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인간도 동물인지 물었다. 그는 동물의 특징을 차근차근 설명한 뒤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답했다.

독일에서 구조된 고양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편지에는 집의 고양이 ‘타이거’가 조금 질투하는 눈치라는 답장을 보냈다.

[진행자] 세계는 그에게 시간과 공간의 비밀을 물었다. 아이들은 동물과 고양이에 관해 물었다. 그는 둘 다 진지하게 답했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아인슈타인–실라르드 서한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보존된 문서 기록과 관련 역사 연구.
  • ‘가장 큰 실수’라는 후회: 라이너스 폴링의 회고에 의존하는 전언이다. 독립적인 교차 자료가 부족하므로 본문에서도 그 한계를 밝혔다.
  • 1946년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 모금 전보: 여러 아카이브에 원문이 보존된 1차 사료.
  • 폴 로브슨, 링컨 대학교 연설과 ‘백인의 병’: 당시 연설 기록과 표준 전기.
  • 1953년 프라우엔글라스 편지와 매카시즘 논란: 당시 《뉴욕 타임스》 보도와 표준 전기.
  • 1,400쪽이 넘는 감시 기록: 미국 FBI가 정보자유법에 따라 공개한 “FBI Records: The Vault — Albert Einstein.”
  • 이스라엘 대통령직 제안과 고사: 공식 서신 기록, Britannica와 관련 사실 검증 자료.
  • 어린이의 동물 질문과 고양이 편지: Princeton Alumni Weekly의 “Albert Einstein Answers His Mail” 및 관련 서신 소개.

12부. 마지막 방정식

장면 34. 프린스턴 병원 · 1955년 4월

미완성 방정식 앞에 선 노년의 과학자

마지막까지 칠판에는 끝나지 않은 통일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복부 대동맥류가 악화된다. 의사들은 수술을 권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거부한다. 오토 나탄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몫을 다했으니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지 않고 품위 있게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병상 곁에는 계산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다. 통일장이론은 끝나지 않았다.

4월 18일 이른 새벽, 그는 독일어로 몇 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곁에 있던 간호사는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 말은 기록되지 않았다.

[진행자] 평생 자연의 언어를 번역한 사람의 마지막 문장은 번역되지 않은 채 남았다.

장면 35. 마지막 서명

죽기 며칠 전에도 그는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준비한 선언에 서명한다. 핵무기의 위험을 경고하고 인류가 전쟁을 포기해야 한다는 호소다. 사후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으로 발표된다.

대중 앞에서 남긴 마지막 행동은 새 이론의 승리를 선언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이론이 열린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었다.

장면 36. 기묘한 후일담

부검을 맡은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는 유족의 명확한 사전 동의 없이 아인슈타인의 뇌를 적출해 보관했다. 뒤늦게 아들 한스 알베르트가 순수한 연구 목적에 한해 이를 받아들였지만 윤리적 논란은 남았다. 뇌 조각은 여러 연구자에게 전달되었고, 일부 연구는 해부학적 특징을 보고했다.

그러나 천재성을 뇌의 어느 주름이나 세포 수 하나로 환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진행자]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천재의 비밀을 물질 한 조각에서 찾으려 했다. 다섯 살 소년이 나침반을 보며 배운 교훈은 오히려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 뒤에는 더 깊은 관계가 숨어 있다.

참고 문헌 및 주석

  • 대동맥류와 재수술 거부, ‘품위 있게 가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 유언집행인 오토 나탄의 증언을 인용한 표준 전기.
  • 마지막 순간의 독일어와 미완성 통일장이론 계산: 두카스·호프만, 표준 전기와 아인슈타인 문서고 관련 기록.
  •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1955년 7월 발표된 선언문 원문.
  • 토머스 하비의 부검과 뇌 보관 논란: 의학사·윤리사 기사와 관련 다큐멘터리. 유족 동의의 시점과 범위를 구분해 서술했다.

에필로그 — 바늘은 다시 북쪽을 가리킨다

[화면] 첫 장면의 나침반이 다시 나타난다.

말이 늦었던 아이. 학교를 뛰쳐나온 열다섯 살. 입학시험에 떨어진 수험생. 조교 자리를 얻지 못한 졸업생. 특허청 3급 심사관. 매주 자기 방정식을 고쳐 온 이론가. 신문이 설명하지 못해 더욱 유명해진 스타. 양말을 포기한 프린스턴의 이웃. 아이들의 숙제를 봐 주고 고양이에게 안부를 전한 편지 작성자. 끝내 완성하지 못한 방정식 옆에서 세상을 떠난 노인.

이 사람을 한 단어로 ‘천재’라고 부르면 편리하다. 그러나 너무 편리해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옳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우주를 정적으로 붙잡으려 했고, 양자역학과 오래 싸웠고, 가족에게 상처를 남겼으며, 정치적 판단의 무게를 뒤늦게 감당해야 했다. 그의 위대함은 실수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당연해 보이는 것을 끝까지 당연하게 두지 않았고, 자기 이론까지 다시 고쳤으며, 자연이 판정을 내릴 권리를 인정했다는 데 있다.

그가 남긴 가장 다정한 유산은 어쩌면 특정 방정식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침반 바늘이 왜 돌아가는가.
두 사람이 말하는 ‘지금’은 정말 같은가.
중력은 힘인가, 공간의 모양인가.
우주는 멈춰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발견한 힘을 감당할 만큼 현명한가.

좋은 질문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오래 산다.

[마지막 화면] 바늘이 천천히 멈춘다. 북쪽이다.

화면이 어두워진다.


기록 및 참고 자료

이 다큐멘터리 전기는 다음 자료를 비롯한 공개 기록과 학술 전기를 종합해 새로 썼다. 특정 전기 작가의 문장을 옮겨 재구성하지 않았다.

  • Helen Dukas & Banesh Hoffmann, Albert Einstein: Creator and Rebel (Viking, 1972) — 1928년부터 아인슈타인의 사후까지 가까이에서 일한 비서 헬렌 두카스의 회고가 포함된 전기.
  •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The Science and the Life of Albert Einstein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 과학적 사실과 연대기의 기본 뼈대로 삼은 학술 전기.
  • Philipp Frank, Einstein: His Life and Times (Knopf, 1947) — 프라하 시절부터 아인슈타인을 알았던 물리학자·철학자의 전기.
  • Albert Einstein, “Autobiographical Notes,” in Paul Arthur Schilpp (ed.),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1949) — 나침반을 비롯한 유년기 기억의 1차 회고.
  • Jürgen Renn & Robert Schulmann (eds.), Albert Einstein/Mileva Marić: The Love Letter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 밀레바와 주고받은 실제 편지.
  • The Born–Einstein Letters, trans. Irene Born (Macmillan, 1971) — ‘주사위’와 ‘유령 같은 원격작용’의 서지적 기반.
  • Ilse Rosenthal-Schneider, Reality and Scientific Truth: Discussions with Einstein, von Laue, and Planck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0) — 1919년 관측 결과를 둘러싼 아인슈타인의 반응에 관한 회고.
  • Charles Chaplin, My Autobiography (1964), Chaim Weizmann, Trial and Error (1949), Maurice Solovine의 서한·회고.
  • 아인슈타인–실라르드 서한,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 전보,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EPR 논문 등 보존된 1차 사료.
  • 노벨상 공식 기록, 스위스 지적재산청 역사 기록, 미국 홀로코스트기념관 신문 아카이브, FBI 공개 문서.
  • Princeton Alumni Weekly의 “Albert Einstein Answers His Mail”, “The Gentle Touch of Genius” 및 관련 서신 기사.
  • 1919년 일식 관측 보고, 당시 영국·미국 언론 보도와 Smithsonian Magazine·Sky & Telescope의 역사 해설.
  • Quote Investigator — ‘세 번째 사람’, 뜨거운 난로, 기타 유명 어록의 출처와 전승 과정을 구분하는 데 사용.

2부 전기

한 특허청 직원이 우주를 다시 그리기까지

일러두기

이 글은 사이트 본편이 다루는 특수·일반 상대성이론의 수학적 내용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일은 이미 다른 장들이 훌륭히 해내고 있다. 대신 이 글이 하려는 일은 하나다 — 그 어려운 이론을 만든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삶을 살았는지 되도록 즐겁게, 그러나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게 들려주는 것.

몇 가지 원칙을 밝혀 둔다. 첫째, 이 글에 등장하는 수식은 $E=mc^2$ 단 하나뿐이다. 둘째, 아인슈타인이나 주변 인물이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을 지어내 대화체로 옮기지 않는다 — 인용은 모두 편지, 인터뷰, 회고록 등 실제 기록에 근거하며, 다만 그 기록을 한국어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짧게 다듬거나 옮겼다. 셋째, 계절이나 방의 풍경, 거리의 공기 같은 정황 묘사는 그 시기·장소에 대한 기록(날씨, 사진, 동시대 증언)에 기대어 절제된 수준으로만 상상을 보탰다 — 이 문서 안에서는 이런 대목을 조심스럽게만 쓴다는 뜻에서 "소심한 상상"이라 불러도 좋겠다. 넷째, 아인슈타인에 관한 일화 중에는 너무 자주 회자된 나머지 출처가 불분명해진 것들이 있다. 이런 경우는 "정확한 출처는 확인되지 않지만 널리 전해진다"는 점을 본문에서 그대로 밝혔다.

주요 참고 원천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비서로 수십 년을 함께 일한 헬렌 두카스가 물리학자 바네시 호프만과 함께 쓴 회고록, 프라하 시절부터 아인슈타인을 알았던 필립 프랑크의 전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직접 아인슈타인과 교류한 물리학자 아브라함 파이스의 학술 전기, 조교였던 레오폴트 인펠트의 회고, 프린스턴 동문회보(Princeton Alumni Weekly)에 실린 아인슈타인의 실제 서신들, 그리고 그 밖에 신뢰할 수 있는 언론·학술 기록.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자.


1. 울름의 아이

1879년 3월 14일,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울름에서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파울리네 아인슈타인 부부의 첫 아이가 태어났다. 갓난아기의 머리가 유난히 크고 뒤통수가 각져서, 산파도 어머니도 잠시 놀랐다는 이야기가 집안에 전해진다.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 머리는 이내 정상적인 모양을 찾았다.

정작 부모를 오래 걱정시킨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 아이는 말이 늦었다. 두 살이 지나도록 또래처럼 재잘거리지 않았고, 세 살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여동생 마야 아인슈타인은 오빠가 어릴 적 "말을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완전한 문장을 속으로 조용히 연습한 뒤에야 입 밖으로 냈다"고 회고했다. 오빠는 새로운 문장을 말하기 전이면 입술을 달싹이며 소리 없이 되뇌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 가정부는 한동안 이 아이가 "좀 모자란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전해진다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가 될 아이를 두고 한 말치고는, 지금 들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지 1년 뒤, 가족은 뮌헨으로 이사했다. 아버지 헤르만과 삼촌 야콥은 그곳에서 전기·가스 설비를 만드는 회사를 차렸다 —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이었다. 어린 알베르트는 이 삼촌의 공장에서 발전기와 전선, 자석을 가지고 노는 소년으로 자랐다.

말이 늦고 유별났던 이 아이가, 훗날 세상을 뒤흔들 첫 실마리를 손에 쥐게 되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 대답은 뜻밖에도 병상에서 찾아온다. 다섯 살 무렵 병으로 누워 있던 알베르트에게 아버지가 심심풀이로 작은 휴대용 나침반을 건넸다. 바늘이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든 항상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아인슈타인은 "뭔가 사물 뒤에 깊이 숨어 있는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훗날 자신의 자전적 노트에서 직접 회고했다. 손도 대지 않았는데 바늘을 움직이는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무엇일까 — 다섯 살 아이는 답을 몰랐지만, 그 물음 자체를 평생 놓지 않았다. 그는 이 감각을 "경이감(Staunen)"이라는 말로 불렀고, 자기 과학 인생의 첫 씨앗으로 꼽았다.

집안에는 또 한 명의 스승이 있었다. 삼촌 야콥은 어린 조카에게 대수학을 가르치며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 "대수학은 즐거운 학문이란다. 우리는 이름을 모르는 작은 동물을 사냥하러 가는 거야. 그래서 그 녀석을 일단 x라고 부르지. 나중에 그 사냥감을 붙잡으면, 그제야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 주는 거란다." 미지수를 잡으러 가는 사냥이라는 이 비유를, 아인슈타인은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않고 여러 인터뷰에서 직접 회고했다. 방정식을 무서운 기호가 아니라 놀이로 처음 만난 아이가, 그 놀이를 평생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 그 답은 이 전기가 앞으로 천천히 보여 줄 것이다.

학교 생활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가톨릭 초등학교에 다닌 유일한 유대인 학생이었던 그는 종교 수업 시간마다 별도로 앉아야 했고, 몇몇 급우들에게 반유대주의적 괴롭힘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 진학한 뒤에는 암기와 군대식 규율을 중시하는 교육 방식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 그는 훗날 이 학교의 교사들을 "하사관 같다"고 표현했다. 반면 집에서는 전혀 다른 배움이 자라고 있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집에 초대되던 의대생 막스 탈메이는 소년 아인슈타인에게 대중 과학서와 기하학 책을 건네주었고, 아인슈타인은 이 책들,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 교재를 밤새 붙들고 있었다 — 그는 이 시기를 "성스러운 기하학 소책자"와 보낸 시간이라 불렀다. 같은 시기 그는 바이올린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어머니의 강요로 마지못해 시작했지만 훗날 모차르트 소나타를 즐겨 연주하는 평생의 취미가 되었다. 프린스턴 시절 이웃들은 저녁이면 그의 집 창문 너머로 바이올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고 회고한다.

나침반과 기하학 소책자와 대수학 사냥 놀이. 이 세 가지만 놓고 보면 못 말릴 모범생의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학교 성적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이 조용한 아이가 정말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차리기까지는 아직 한참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2. 방황하는 10대와 취리히

1894년,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가족은 이탈리아 밀라노로 옮겨 갔다. 그런데 열다섯 살 알베르트는 뮌헨의 김나지움에 남아 학업을 마치기로 되어 있었다. 혼자 남겨진 소년은 몇 달 뒤 학교를 자퇴하고, 놀랍게도 의사의 진단서까지 받아낸 뒤 가족을 따라 이탈리아로 가 버렸다. 신경쇠약을 이유로 든 그 진단서 뒤에는, 사실 군대식 학교가 죽기보다 싫었던 한 10대의 결단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훗날 이 무렵 자신을 "학교에서 도망친 아이"라고 표현했다.

이탈리아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오늘날의 ETH 취리히) 입학을 시도했다. 정규 나이보다 두 살이나 어린 열여섯 살에 치른 이 도전은 과연 성공했을까? 아니었다 — 그는 낙방했다. 수학과 물리 시험지는 채점관이 놀랄 만큼 뛰어났지만, 프랑스어와 화학과 식물학 시험지는 정반대였다. 이 실패가 결정적인 좌절로 남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학교 측은 수학과 물리에서 두드러진 이 낙방생의 시험지를 눈여겨보았고, 스위스 아라우의 주립학교에서 1년을 더 보내고 다시 도전해 보라고 권했다. 흥미롭게도 이 학교는 뮌헨의 김나지움과 정반대였다 — 암기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훗날 이 1년을 "가장 행복했던 학창 시절"로 꼽았고, 이듬해 재수 끝에 마침내 입학 자격을 얻었다.

1896년, 아인슈타인은 독일 국적을 공식으로 포기했다 — 병역을 피하려는 목적이 컸다. 같은 해 가을 그는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해 물리학 교사 자격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의실 한쪽에서, 이후 20년 가까이 그의 인생을 함께 뒤흔들게 될 한 사람과 마주친다 — 세르비아 출신의 유일한 여학생, 밀레바 마리치였다. 국적을 포기한 뒤 몇 해 동안 그는 사실상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고,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01년에야 스위스 시민권을 얻는다. 밀레바는 수학과 물리에서 두각을 나타낸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명이었고, 둘은 함께 물리학 논문을 읽고 토론하며 가까워졌다. 아인슈타인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물리학 이야기와 연애 감정이 뒤섞여 있는데, 그중 한 통에는 "우리의 상대운동에 관한 논문을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대목이 있다 — 여기서 "상대운동"이라는 단어가 후일의 '상대성이론'을 예고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며, 밀레바가 이론 형성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적인 주제로 남아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정작 학업 성적은 밀레바보다 아인슈타인이 나았다. 담당 교수 중 한 명인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훗날 시공간을 하나로 통합하는 수학적 틀을 만들어 상대성이론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인물인데, 재미있게도 그는 학생 시절의 아인슈타인을 "게으른 개(fauler Hund)"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강의를 자주 빼먹고 도서관에서 맥스웰과 헤르츠 같은 최신 물리학자들의 원전을 독학하던 학생이 훗날 스승의 이론적 틀 위에서 우주를 다시 쓰게 된다는 것은, 지금 돌아보면 역사가 종종 부리는 짓궂은 농담처럼 느껴진다.

밀레바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헝가리 정교회 집안 출신에 나이도 세 살 많고 다리를 저는 세르비아 여성과의 교제를,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파울리네는 처음부터 강하게 반대했다. 아인슈타인이 밀레바를 두고 "그녀 같은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매정한 말을 편지에 옮겨 적었을 정도로 갈등은 깊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학구적 동반자 관계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꾸린 독서 모임 "올림피아 아카데미"는 이름과 달리 아카데미는커녕 정식 모임 장소도 없이, 값싼 소시지와 치즈로 저녁을 때우며 밤늦도록 흄의 인식론이나 푸앵카레의 과학철학을 놓고 토론하는 세 청년의 사적인 술자리에 가까웠다. 이 허름한 모임에서 나눈 대화들이 훗날 그의 물리학적 사고방식 — 특히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근본부터 의심하는 태도 — 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여러 과학사가들의 평가다.


3. 무명의 시절, 그리고 특허청

1900년 졸업 후 아인슈타인 앞에 놓인 것은 화려한 학계 경력이 아니라 실업이었다. 그는 대학에 남아 조교 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거듭 거절당했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두고 "부모님께 짐이 되는 것이 끔찍하게 괴로웠다"고 적었다. 한동안 그는 가정교사와 임시직을 전전했고, 1902년 초에는 밀레바와의 사이에서 딸 리제를이 태어났다 — 두 사람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이 딸의 이후 행적은 지금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역사가들 사이의 오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전환점은 대학 동창 마르셀 그로스만의 아버지가 마련해 주었다. 특허청장 프리드리히 할러에게 이 무직의 청년을 추천해 준 것이다. 그런데 정작 취직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 채용 공고에는 기계공학 학위가 필요하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물리학을 전공한 아인슈타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할러는 그럼에도 그를 면접에 불러 직접 시험해 보기로 했고, 몇 달의 대기 끝에 1902년 6월, 아인슈타인은 베른의 스위스 특허청에 3급 기술 심사관으로 정식 취직한다. 언뜻 물리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자리는, 뜻밖에도 그에게 완벽한 조건이었다. 하루 여덟 시간 근무는 규칙적이었고, 특허 출원서의 허점을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일은 그의 성정에 잘 맞았다. 그는 훗날 이 일자리를 "세속적인 수도원"이라 불렀다 — 생계를 해결하면서도, 남는 시간과 머릿속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무실 서랍 한쪽에는 자신의 물리학 계산이 담긴 종이를 넣어 두고, 상사가 지나가면 재빨리 서랍을 닫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그는 이 서랍 속 메모들을 장난스럽게 "이론물리학과"라고 불렀다고 한다.

1903년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결혼했다. 이듬해 아들 한스 알베르트가 태어났다. 베른에서 그는 몇몇 친구들과 자칭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어, 흄과 스피노자와 푸앵카레를 함께 읽고 밤늦도록 토론했다 — 학계의 어떤 공식 소속도 없이, 이 작은 사설 모임이 사실상 그의 대학원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식 학위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취리히 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는데, 여기서도 사소하지만 실감 나는 삽화가 하나 전해진다 — 논문이 대학 규정상 너무 짧다는 이유로 반려될 뻔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본문의 논지를 바꾸는 대신 문장 한 줄을 더 써넣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전해진다. 우주의 크기를 재는 데는 대범했던 사람이, 논문의 분량을 재는 시시한 잣대 앞에서는 이렇게 실용적으로 대응한 셈이다. 1905년, 이 논문("분자 크기의 새로운 결정법")은 무사히 통과되어 그는 마침내 박사가 되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하급 공무원이자 이제 막 박사 학위를 딴 무명의 청년이었던 이 남자가, 이 몇 년 사이 인류 역사를 바꿀 준비를 조용히 마쳐 가고 있었다.


4. 기적의 해, 1905

1905년, 스물여섯 살의 특허청 심사관은 단 몇 달 사이에 네 편의 논문을 물리학 학술지 『물리학 연보』에 보냈다. 오늘날 이 해를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라 부르는데, 그럴 만하다 — 논문 하나하나가 따로 놓고 봐도 노벨상감이었다.

3월 논문은 빛이 파동일 뿐 아니라 낱알(광양자)처럼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 훗날 그에게 실제로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 준다. 4월과 5월 논문은 물 위에 뜬 꽃가루가 불규칙하게 떨리는 현상(브라운 운동)을 이용해 원자와 분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사실상 증명해 냈다 — 당시까지도 원자의 존재를 의심하던 과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6월 논문은 '특수상대성이론'이었다. 그리고 9월, 그는 짧은 후속 논문 한 편을 더 보낸다. 세 쪽 남짓한 이 논문의 결론에 등장하는 식이 바로

$$E = mc^2$$

이다. 에너지와 질량이 사실은 같은 것의 다른 얼굴이라는 이 문장은, 인류가 그때까지 우주에 대해 알던 것을 통째로 다시 쓰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폭탄 같은 논문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세상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짐작과는 정반대로, 거의 아무 반응도 없었다. 특허청 심사관이라는 무명의 저자가 쓴 논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물리학자는 극소수였다. 베를린 대학의 원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이 논문을 알아보고 학생들과 함께 진지하게 토론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아인슈타인이 학계의 눈에 띄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 반응이 얼마나 더뎠는지를 잘 보여 주는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플랑크의 젊은 제자였던 물리학자 막스 폰 라우에는 이 논문의 저자를 직접 만나 보려고 베른까지 찾아갔다. 당연히 나이 지긋한 교수를 상상하며 특허청 앞에서 기다리던 그는, 서른도 안 된 젊은 남자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고 한다 — 이 사람이 설마 그 논문을 쓴 사람일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뒤늦게 오해를 풀고서야 두 사람은 마주 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꾼 이론의 저자가, 정작 그 이론을 궁금해하며 찾아온 사람 눈에도 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이 장면은 당시 그의 처지를 무엇보다 잘 말해 준다. 아인슈타인은 그 뒤로도 몇 해를 더 특허청에서 근무를 계속해야 했다 — 세상을 바꾼 사람이, 세상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던 셈이다.

음악은 이 무렵부터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동반자가 되었다. 그는 물리학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바이올린을 들고 방 안을 서성이며 즉흥으로 곡을 켰다고 여러 지인이 회고한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의 상당 부분은 바이올린에서 왔다"고 말했고, "내가 물리학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음표를 정확히 짚어 내는 일과 방정식을 정확히 풀어내는 일 사이에 그가 본질적인 차이를 두지 않았다는 점은,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여러 동료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대목이다.


5. 인정, 그리고 갈라지는 결혼 생활

1908년부터 아인슈타인은 서서히 학계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른 대학의 무급 강사로, 1909년에는 취리히 대학의 부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내 특허청을 떠나던 날, 동료 심사관들이 그의 책상 위에 커다란 거위 모형을 놓아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이 무렵 그의 강의는 그리 인기가 없었지만(그는 원고 없이 즉흥적으로 강의하다가 스스로 막히는 일이 잦았다고 학생들은 회고한다), 학계는 이미 그의 이름을 주목하고 있었다.

1911년 그는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으로, 1912년에는 다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잦은 이동은 젊은 가족에게 부담이었다. 밀레바는 두 아들을 데리고 여러 도시를 전전해야 했고, 한때 물리학도로서 자신의 지적 삶을 꿈꾸었던 그녀는 점점 집안일과 남편의 뒷바라지에 붙들리는 처지가 되어 갔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의 편지에는 아내에 대한 애정보다 짜증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결정적 전환은 1914년, 베를린의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가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를 초빙하면서 찾아온다. 이 이사가 흔들리던 부부 관계를 다시 붙잡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마지막 균열을 만들까? 결과는 후자였다. 아인슈타인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베를린으로 이사했지만,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밀레바는 아이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돌아가 버렸다. 두 사람은 사실상 여기서 결혼 생활을 끝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지식인 다수가 서명한 전쟁 찬양 성명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명이었고, 오히려 반전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 애국주의가 들끓던 베를린에서 이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다.

홀로 남은 베를린의 아파트에서, 전쟁의 포성이 유럽을 뒤덮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거의 은둔하다시피 하며 한 가지 문제에 매달렸다. 중력을 기하학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일 — 훗날 일반상대성이론이라 불리게 될 그 이론이었다.


6. 전쟁 속에서 완성된 이론, 그리고 재혼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해 가는 마지막 몇 주는 아인슈타인 생애에서 가장 격렬한 지적 질주였다고 전해진다. 1915년 11월, 그는 매주 목요일마다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에 나가 강연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 넉 주 동안 매번 지난주에 발표한 방정식을 스스로 수정해 새로운 버전을 내놓았다. 한 주 사이에 자신의 이론을 통째로 다시 계산해 학계 앞에 다시 내놓는 일을 넉 주 연속으로 반복한 셈이다. 이 시기 그는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계산에 매달렸다고 전해지며, 훗날 이 몇 주를 두고 "이런 흥분은 내 인생에서 다시는 겪지 못할 것"이라는 취지로 회고했다. 이 마지막 스퍼트 기간에 괴팅겐의 저명한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도 거의 같은 결론에 독자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진행 상황을 편지로 주고받으며 견제와 자극을 동시에 주고받았는데, 자칫 우선권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아인슈타인이 한동안 힐베르트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누가 최종 방정식을 먼저 완성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과학사가들의 흥미로운 연구 주제로 남아 있다 — 다만 대다수 역사가들은 두 사람의 작업이 경쟁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은 얽힌 협력에 가까웠다고 평가하며, 최종적으로 물리적으로 옳은 장방정식의 형태를 완성해 발표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 힘겨운 시기,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을 돌보아 준 사람은 사촌 누나인 엘자 뢰벤탈이었다. 이혼 전부터 이미 편지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1919년 밀레바와의 이혼이 정식으로 마무리되자 곧 결혼했다. 이혼 조건에는 흥미로운 조항이 하나 있었다 — 아인슈타인은 장차 노벨상을 받게 되면 그 상금 전액을 밀레바와 아이들에게 넘기기로 약속했다. 그때는 노벨상 수상이 확정되기 한참 전이었으니, 아직 받지도 않은 상의 상금을 걸고 이혼에 합의한 셈이다. 1922년 실제로 노벨 물리학상 상금이 그렇게 밀레바에게 전달되었을 때, 이 약속은 지켜졌다.

같은 해인 1919년, 전쟁으로 갈라졌던 유럽 과학계에 극적인 소식이 날아든다.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이 이끄는 관측대가 아프리카 서해안의 섬 프린시페와 브라질의 소브랄로 떠나 있었다. 목적은 단 하나 — 5월 29일의 개기일식을 이용해, 태양 옆을 지나는 별빛이 아인슈타인의 예측대로 정확히 휘는지를 재는 것이었다. 뉴턴의 중력 법칙에 따르면 빛도 조금은 휠 것이었지만, 아인슈타인의 새 이론이 예측한 각도는 그 두 배에 가까웠다. 두 값 중 어느 쪽이 실제 하늘과 들어맞을지, 몇 달 동안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이 초조한 기다림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아인슈타인의 제자 일제 로젠탈슈나이더였다. 훗날 그녀가 직접 남긴 회고에 따르면, 관측 결과를 확인해 주는 전보가 아인슈타인의 서재로 도착하던 그 순간 그녀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편지를 다 읽은 아인슈타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히 결과를 알려 주었다. 로젠탈슈나이더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만약 관측 결과가 반대로 나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냐고.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이러했다고 그녀는 기록한다. "그랬다면 하느님이 안되셨겠지요. 이론은 어차피 옳으니까요." 자신의 이론이 실험으로 확인되기 전부터 이미 그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 태연함은, 그의 성격을 보여 주는 동시에 다소 오만하게 들리기도 한다 — 다행히 이번만큼은 하늘도 그의 편이었다.

별빛이 태양 옆을 지날 때 얼마나 휘는지를 측정한 실제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예측과 정확히 들어맞았고, 뉴턴 역학의 오랜 권위를 뒤흔들었다. 1919년 11월 7일 자 런던 타임스는 "과학의 혁명 — 우주에 관한 새 이론, 뉴턴의 사상이 뒤집히다"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며칠 뒤 뉴욕 타임스는 "하늘의 빛이 온통 삐뚤어졌다(Lights All Askew in the Heavens)"는 제목으로 이 소식을 전했는데, 정작 기사를 쓴 기자는 상대성이론의 수학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서둘러 기사를 마감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전쟁이 막 끝나 독일과 영국이 여전히 서로를 적대시하던 그 시점에, 영국 과학자들이 독일 과학자의 이론을 검증해 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화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날 이후 아인슈타인의 우편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각국 신문과 학회의 강연 요청은 물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는 팬레터와 상담 편지, 심지어 청혼 편지까지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한동안 매일 수십 통씩 밀려드는 편지에 일일이 답하려 애썼지만 곧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8년, 몸이 크게 상해 요양이 필요해지자 그는 결국 이 방대한 우편물을 전담해 줄 비서를 따로 두게 되는데, 이때 합류한 헬렌 두카스는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 30년 가까이 그의 곁을 지키며 훗날 가장 신뢰할 만한 증언자 중 한 사람으로 남는다.

이 소동 속에서 태어난 유명한 농담이 하나 있다. 새 이론을 두고 온 세상이 어렵다고 아우성치던 그때, 한 기자가 아서 에딩턴에게 "이 이론을 진짜로 이해하는 사람이 세상에 세 명뿐이라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에딩턴이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기자, 기자가 "너무 겸손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딩턴 교수님"이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에딩턴이 대답했다고 한다 — "아닙니다, 그 세 번째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일화는 여러 전기와 회고에서 반복해 전해지지만, 실제로 이 대화가 정확히 이 형태로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 일화가 그토록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 새 이론이 얼마나 난해하게 여겨졌는지를, 그리고 그 난해함을 대하는 당대 과학자들의 여유를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 아인슈타인은 특허청 출신의 물리학 교수에서,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세계적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7. 스타가 된 과학자

노벨위원회는 1921년도 물리학상을 두고 뚜렷한 합의를 이루지 못해 그해는 결국 수상자 없이 넘겼다. 그리고 1922년 11월, 위원회는 보류해 두었던 1921년도 물리학상을 아인슈타인에게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 같은 날 1922년도 상은 닐스 보어에게 돌아갔다. 흥미롭게도 아인슈타인이 받은 이 상은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광전효과의 법칙을 발견한 공로"로 수여되었다 — 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도 검증이 진행 중이며 논쟁적이라는 이유로 노벨위원회가 몸을 사린 결과였다. 세계를 뒤바꾼 이론을 만든 사람이, 정작 그 상은 다른 논문으로 받은 셈이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앞서 보았듯 상금은 어차피 이혼 조건에 따라 밀레바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수상 소식을 들은 정황부터가 이 사람다웠다. 마침 그는 일본으로 향하는 순회강연을 위해 배 위에 있었고, 노벨상 발표 소식은 항구를 거쳐 전보로 뒤늦게 배에 전달되었다. 서둘러 유럽으로 돌아가 시상식에 참석하는 대신, 그는 일정을 그대로 이어가며 일본 방문을 마쳤다 — 정작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공식 시상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도쿄, 교토, 센다이 등지에서 그의 강연을 들으려는 인파가 몰려, 한 강연장은 좌석의 몇 배에 달하는 청중으로 가득 찼다고 현지 신문이 보도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때 받은 극진한 환대와 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일기에 적었으며, 이후 일본을 향한 애정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혔다.

명성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제 강연 요청과 인터뷰 요청에 파묻혔고, 어디를 가든 군중이 몰려들었다. 미국, 일본, 팔레스타인, 남미를 도는 순회강연에 나섰고, 가는 곳마다 신문은 그의 헝클어진 머리와 콧수염,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을 실었다. 1931년 할리우드에서는 찰리 채플린과 만나 영화 '시티 라이트' 시사회에 함께 참석했는데, 몰려든 인파에 놀란 아인슈타인에게 채플린이 건넨 말이 유명하다. "사람들이 저에게 환호하는 건 다들 제가 하는 일을 이해하기 때문이고, 선생님께 환호하는 건 아무도 선생님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 일화는 채플린 자신의 자서전에 직접 기록되어 있어, 앞서 소개한 몇몇 출처 불명확한 이야기들과 달리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편이다.

명성은 새로운 책임도 함께 안겨 주었다. 1921년 그는 시온주의 지도자 하임 바이츠만과 함께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예루살렘에 세워질 히브리 대학을 위한 기금을 모으는 순회 길에 나섰다. 대서양을 건너는 며칠 동안 이 물리학자와 이 정치가는 갑판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바이츠만 자신이 훗날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항해 내내 매일같이 그에게 상대성이론을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뉴욕에 도착할 무렵에는, 정작 이론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 씨가 정말로 이 이론을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그는 재치 있게 털어놓았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크게 내세운 적 없던 아인슈타인이었지만, 유럽 곳곳에서 고조되는 반유대주의를 목격하며 그는 점점 더 공개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는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다. 국제연맹의 지적협력위원회에 참여했고, 각국 정부에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라고 촉구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다만 이 평화주의는 훗날 나치의 위협 앞에서 그가 스스로 재고하게 되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신념이었다.

이 시기 그의 유머 감각을 보여 주는 일화도 여럿 전해진다. 한 신문기자가 상대성이론을 한마디로 설명해 달라고 조르자, 아인슈타인이 "예쁜 아가씨와 함께 있으면 한 시간이 1분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난로 위에 앉으면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 그것이 상대성이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가장 널리 인용되는 아인슈타인의 '명언' 중 하나다. 다만 이 이야기는 1929년 뉴욕의 한 신문이 "이런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는 식으로 처음 소개한 것이 출발점이며, 아인슈타인 본인이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는 직접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 그의 비서 헬렌 두카스가 유사한 표현을 썼다는 간접적 정황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일화가 백 년 가까이 살아남은 것은, 어려운 이론을 이렇게라도 붙잡아 보려는 대중의 마음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일 것이다.


8. 가장 오래간 논쟁 — 보어와 주사위

아인슈타인의 만년을 이해하려면 정치 활동 못지않게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 그가 평생 씨름한, 그러나 끝내 승복하지 않은 논쟁이다. 1920년대 들어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그리고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를 중심으로 양자역학이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초기 양자론의 토대를 놓은 사람 중 하나였음에도, 그는 이 새 이론이 그리는 세계상 — 입자의 위치나 붕괴 시점이 근본적으로 확률로만 정해진다는 그림 — 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1926년, 그는 오랜 벗인 물리학자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적어도 나는 확신한다 — 그분(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훗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형태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편지는 보른-아인슈타인 서한집에 실제로 남아 있어, 앞서 소개한 몇몇 출처 불명확한 어록들과 달리 확실한 근거를 지닌 인용이다. 1927년과 1930년 브뤼셀에서 열린 솔베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 문제를 놓고 격렬히 토론했다고, 그 자리에 있었던 여러 물리학자들이 회고한다. 아인슈타인은 매일 아침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을 무너뜨릴 새로운 사고실험을 들고 나타났고, 보어는 그날 저녁까지 반드시 그 허점을 찾아내 반박했다는 것이다 — 마치 매일 새로운 라운드가 열리는 지적 권투 시합 같았다고 참석자들은 전한다.

1935년, 프린스턴에 자리 잡은 아인슈타인은 동료 보리스 포돌스키, 네이선 로젠과 함께 양자역학이 실재를 온전히 기술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오늘날 세 사람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 'EPR 논문'이라 부른다). 이 논문이 제기한 문제 —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입자가 마치 순간적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것처럼 행동하는 현상 — 을 두고, 아인슈타인은 1947년 보른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유령 같은 원격작용(spukhafte Fernwirkung)"이라는 표현을 써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

역사는 이 논쟁에서 다소 아이러니한 결말을 내놓았다. 아인슈타인 사후 수십 년이 지나 실제로 이루어진 정밀한 실험들(이른바 '벨 부등식' 검증 실험)은, 그가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던 바로 그 '유령 같은 원격작용'에 해당하는 현상이 실제 자연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해 주었다. 오늘날 양자정보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 전체가 바로 이 현상 위에 서 있다. 그럼에도 이 논쟁을 두고 아인슈타인을 그저 '틀린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 그는 이 논쟁을 통해 양자역학이 진지하게 답해야 할 질문들을 세상에 처음으로 명확히 던진 사람이었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양자정보 이론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평생 서로를 깊이 존경하는 벗으로 남았다 — 학문적으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사적으로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 것이, 이 세대 물리학자들 사이의 흔치 않은 미덕이었던 셈이다.


9. 망명

위협의 그림자는 사실 1933년보다 훨씬 일찍부터 드리워져 있었다. 1922년,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던 독일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우익 극단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라테나우는 아인슈타인의 지인이기도 했다. 곧이어 아인슈타인 자신의 이름도 비슷한 극우 명단에 올라 있다는 경고가 전해졌고, 그는 한동안 예정된 강연들을 취소하고 몸을 낮춰야 했다. 이때만 해도 이것이 훗날 닥칠 일의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었을까?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취임했다. 그 무렵 아인슈타인은 마침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손님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들은 뒤 독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그는 기자들에게 "독일에 관용이 남아 있는 한 그곳에 머물겠지만, 그런 선택지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해진다.

돌아온 것은 벨기에였다. 독일에서는 나치 돌격대가 그의 베를린 자택과 별장을 수색했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그의 저작들은 다른 '비독일적' 서적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불태워지는 화형식의 대상이 되었다. 나치와 연계된 한 잡지는 그의 목에 상당한 금액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보도되었고, 그의 이름은 나치 정권이 작성한 정적 살생부에도 올랐다고 전해진다. 포츠담 인근 카푸트에 있던 그의 여름 별장은 돌격대에 의해 수색당했는데, 그들이 압수한 물건 중에는 그가 요리에 쓰던 식칼 한 자루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나치 선전 매체는 이 평범한 식칼을 "혁명을 획책하기 위해 숨겨 둔 무기"라며 대서특필했다 — 세계적 물리학자를 잡겠다며 벌인 이 소동의 허술함은, 그 시절의 광기와 어이없음을 동시에 보여 준다. 8월, 아인슈타인은 벨기에 주재 독일 영사관을 찾아가 독일 시민권을 공식으로 포기했다. 신변의 위협이 이어지자 벨기에 왕실은 한동안 그에게 경호원을 붙여야 했다.

같은 해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하원의원 로커램프슨의 주선으로 노퍽 해안의 외딴 오두막에 머물렀다. 이 시기 찍힌 사진 한 장이 유명한데, 경호를 위해 아인슈타인 곁에 엽총을 든 젊은 여성 경호원 두 명이 서 있는 모습이다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론물리학자가 사냥터 오두막에서 총을 든 경호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이 장면은, 그 시절의 위태로움과 어딘가 초현실적인 부조화를 동시에 보여 준다. 1933년 10월, 아인슈타인은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 올랐다. 이후 그는 다시는 유럽 땅을 밟지 않았다.


10. 프린스턴의 현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1930년 설립된, 강의 의무 없이 순수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독특한 기관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곳의 초창기 종신교수로 합류했다. 이후 20여 년, 그는 이 조용한 대학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아내 엘자는 193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그의 집안 살림은 비서 헬렌 두카스와, 독일에서 뒤늦게 합류한 여동생 마야가 맡았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의 겉모습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 다 늘어난 스웨터,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에 신은 구두, 정리하지 않은 백발. 그는 양말을 신지 않는 이유를 두고 "엄지발가락이 결국 구멍을 뚫어 버리는데 뭐하러 신느냐"는 취지로 농담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서재는 수표를 책갈피 대신 쓰다가 그대로 잊어버리는 바람에, 몇 년씩 현금으로 바꾸지 않은 수표가 책 사이에서 발견되곤 했다는 이야기도 여러 회고에서 반복해 등장한다.

프린스턴 사람들 사이에는 그의 건망증에 관한 이야기도 여럿 전해진다. 그중 하나는, 한번은 고등연구소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아인슈타인 박사님 댁 주소를 알려 달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처음엔 유명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려고 "죄송하지만 그 주소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이 다급하게 "제가 바로 그 아인슈타인인데, 지금 제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렸습니다"라고 밝힌 뒤에야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는 버전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져 확언하기 어렵지만, 프린스턴 지역 사회에 오래도록 회자되어 온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여름이면 그는 낡은 목조 범선을 타고 근처 호수나 롱아일랜드 해협으로 나가는 것을 즐겼다. 문제는 그가 항해 실력만큼은 끝내 늘지 않았다는 점이다 — 그는 수영도 서툴렀고 바람을 읽는 데도 능숙하지 못해서, 배가 뒤집히거나 바람이 죽어 오도 가도 못하게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구조를 기다렸다고 이웃과 동료들은 입을 모아 회고한다. 우주의 시공간이 어떻게 휘어지는지 계산해 낸 사람이, 정작 눈앞의 바람과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아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다정한 농담거리가 되었다.

프린스턴 주민들 사이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웃에 살던 한 소녀가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산수 숙제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곤 했는데,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소녀의 어머니가 세계적 석학에게 폐를 끼쳤다며 몹시 미안해하자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괜찮습니다, 저도 그 아이에게서 얻은 것이 그 아이가 저에게서 얻은 것보다 많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아마 그 아이가 사탕이나 과자를 들고 찾아왔던 데 대한 답례 섞인 농담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눈 상대는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정반대의 기질이었다 — 아인슈타인은 사교적이고 유머러스했고, 괴델은 극도로 내성적이고 불안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거의 매일 고등연구소에서 프린스턴 자택까지 함께 걸으며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다. 아인슈타인은 만년에 "나 자신의 연구는 이제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내가 여전히 연구소에 나가는 건, 그저 괴델과 함께 집까지 걸어갈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1947년, 괴델이 미국 시민권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일어난 일화도 유명하다. 헌법을 꼼꼼히 연구하던 괴델은 이론적으로 미국이 합법적 절차만으로 독재국가가 될 수 있는 논리적 허점을 발견했다며 흥분했고, 시험관 앞에서 이 발견을 이야기하려 했다. 아인슈타인과 또 다른 친구는 시험 당일 괴델을 법원까지 동행하며 그 이야기만은 절대 꺼내지 말라고 진땀을 빼며 설득했다는 것이다 — 다행히 시험은 무사히 끝났고, 괴델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정작 프린스턴에서 그가 매일 몰두한 연구는 무엇이었을까? 대중은 은퇴한 현자가 여유롭게 노년을 보내리라 상상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는 죽는 날까지 하루도 손을 놓지 않고 한 가지 목표에 매달렸다 —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의 틀로 묶어 내는 '통일장이론'이었다. 문제는 이 연구가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물리학의 중심 무대는 이미 그가 받아들이지 못한 양자역학 쪽으로 완전히 옮겨 가 있었다는 점이다. 동료들 상당수는 그가 시대에 뒤처진 헛수고를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이 고독한 후반생의 연구는 과연 결실을 보았을까? 그 답은 이 전기의 마지막 장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두 아들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다른 빛깔을 띠어 갔다. 큰아들 한스 알베르트는 아버지처럼 학자의 길을 걸어 훗날 미국 버클리 대학교의 수리공학 교수가 되었다 — 이혼 직후에는 아버지와 상당한 거리를 두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관계는 점차 회복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작은아들 에두아르트의 삶은 훨씬 더 아픈 쪽으로 흘러갔다. 음악과 시에 재능을 보이며 정신의학자를 꿈꾸던 그는 20대 초반 심각한 정신질환 진단을 받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 아인슈타인은 대서양 너머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 외에는 아들을 다시 만나지 못했고, 에두아르트는 결국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지만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965년 세상을 떠났다. 대중 앞에서는 늘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이었지만, 이 문제만큼은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화려한 명성의 이면에 놓인, 그의 생애에서 가장 조용하고 무거운 대목이다.

한편 1939년,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는 나치 독일이 핵분열을 이용한 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을 우려하며 아인슈타인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함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다 — 원자핵 연쇄반응이 강력한 폭탄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미국도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에 서명은 했지만 이후 원자폭탄 개발 계획(맨해튼 계획)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종전 후 그는 이 편지에 서명한 일을 두고 깊이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이 남긴 회고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그에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 — 루스벨트에게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권하는 편지에 서명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이 발언 역시 폴링 한 사람의 전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밝혀 둘 필요가 있다.


11. 만년의 발언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인슈타인이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버전이 전해지지만, 그가 이후의 삶에서 보인 행동만큼은 분명하다. 그는 이듬해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를 이끌며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모금 전보를 미국 각지에 보냈는데, 그 전보에는 "원자의 풀려난 힘은 우리의 사고방식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례없는 파국을 향해 표류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담겼다. 전쟁이 끝난 뒤 아인슈타인은 남은 삶을 반핵 운동과 세계정부론, 그리고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 상당 부분 할애했다. 그는 흑인 인권운동가 폴 로브슨과 오랜 친분을 나누었고, 흑인 대학인 링컨 대학교에서 명예학위를 받은 자리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을 "백인의 병"이라 부르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 세계적 명성을 지닌 백인 과학자가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3년, 뉴욕의 한 교사가 의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소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물어 오자, 아인슈타인은 답장에서 지식인이라면 이런 소환에 협조를 거부해야 하며 설령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취지로 답했다. 이 편지가 뉴욕 타임스에 실리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 어떤 이들은 그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어떤 이들은 양심을 지킨 지식인의 표본으로 여겼다. 정작 그가 정말로 감시할 만한 위험인물이었는지는, 훗날 공개된 기록이 스스로 답해 준다. 연방수사국은 이미 1930년대부터 그를 감시하고 있었고, 그의 사후 공개된 파일은 1,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밝혀졌다 — 그러나 그 안에서 실제 범죄나 스파이 행위의 증거는 끝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1952년,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자 오랜 벗이었던 하임 바이츠만이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 정부는 아인슈타인에게 그 후임 대통령직을 제안했다 —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자리였지만, 한 나라의 국가원수 자리를 과학자에게 제안한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는 평생 다루어 왔지만,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소질도 경험도 없다"는 취지로 고사의 뜻을 밝혔다.

이 무렵 그의 답장 편지들에는 만년의 여유와 유머가 여전히 살아 있다. 1953년 오하이오의 한 초등학교 학급이 "인간도 동물인가요?"라는 질문을 담은 편지를 보내오자, 그는 "동물은 먹고,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자라고, 스스로 움직이다가 때가 되면 죽는 존재입니다. 이 기준으로 벌레도 닭도 개도 원숭이도 동물이라 부르지요. 여러분 자신도 이 기준에 비추어 스스로 판단해 보세요"라고 답했다. 1946년에는 독일에서 구조된 반쯤 죽어 가던 고양이가 자신처럼 독일을 떠난 것이 현명했다는 편지를 받고는, "제 이름을 가진 그 고양이에게 가장 따뜻한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 집 고양이 '타이거'도 이 이야기에 흥미로워하며 살짝 질투하는 눈치입니다"라고 답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어린이와 낯선 이들의 편지 하나하나에 이렇게 정성껏, 그리고 유쾌하게 답했다는 사실은 그의 성정을 보여 주는 좋은 창이다.


12. 마지막 날들과 남은 것

1955년 4월, 아인슈타인은 복부 대동맥에 생긴 동맥류가 파열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미 1948년에 한 차례 같은 부위를 수술로 보강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의사들이 재수술을 권하자 그는 거부했다. 오랜 친구이자 유언집행인이었던 오토 나탄이 전한 바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나는 가고 싶을 때 가고 싶다. 인위적으로 생명을 늘리는 건 품위 없는 일이다. 나는 내 몫을 다했으니, 이제 갈 시간이다. 우아하게 가고 싶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4월 18일 이른 새벽, 프린스턴 병원에서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곁을 지키던 간호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몇 마디를 독일어로 중얼거렸다고 훗날 전했지만, 정작 그 간호사는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스물여섯 살에 자기 자신이 손으로 쓴 논문으로 온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다시 그렸던 이 사람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영영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서 던졌던 질문 — 30년 가까이 매달린 통일장이론은 결실을 보았을까 — 에는 이제 답할 수 있다. 병원 침상 곁 탁자에는 마지막까지 풀다 만 방정식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끝내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묶어 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물리학자 대부분은 그가 붙든 접근법 자체가 막다른 길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모든 힘을 하나의 원리로 통합하려는 이 꿈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 오늘날에도 물리학자들은 이름을 바꾼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마지막 30년은 실패라기보다는 아직 아무도 끝내지 못한 숙제를 남긴 것에 가깝다.

세상을 뜨기 불과 며칠 전, 그는 병상에서도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준비하던 성명서에 서명했다. 핵무기 경쟁의 위험을 경고하며 세계 각국 정부에 전쟁이라는 수단 자체를 포기할 것을 촉구하는 이 문서는 그의 사후에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으로 발표되어, 오늘날까지도 반핵 운동의 상징적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대중 앞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공식 행동이, 자신이 열어젖힌 에너지의 문이 인류를 파괴하지 않도록 애쓰는 경고였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 뒤에는 뜻밖의 뒷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부검을 맡았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는, 유족의 명확한 사전 동의 없이 아인슈타인의 뇌를 적출해 보관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논란이 일었고, 아들 한스 알베르트는 훗날 순수한 과학 연구 목적에 한해 사후 승낙했다. 하비는 이후 수십 년간 이 뇌 조각들을 여러 연구자에게 나누어 보내며 자신의 차 트렁크에 실은 채 미국 곳곳을 돌아다녔다는, 지금 들으면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몇몇 후속 연구는 아인슈타인의 뇌에서 신경교세포 밀도나 두정엽 구조 등에 관해 흥미로운 관찰을 보고했지만, 천재성을 뇌 하나의 해부학적 특징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보는 과학자는 오늘날 거의 없다. 정작 아인슈타인 자신은 화장을 원했고, 유해는 가족과 극소수 지인들만 참석한 조용한 자리에서 화장되어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뿌려졌다.


남는 것

특허청 3급 심사관이 쓴 세 쪽짜리 후속 논문의 결론에 적힌 $E=mc^2$라는 짧은 식은, 백 년이 넘도록 인류가 우주와 에너지,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을 계속 바꾸어 놓고 있다. 이 글은 그 식이 어떻게 유도되는지, 그 뒤에 놓인 장방정식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루지 않았다 — 그 이야기는 이 사이트의 다른 장들이 훨씬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들려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이 짧은 전기가 전하고 싶었다. 이 모든 이론을 만든 사람은 신탁을 전하는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말이 늦었던 아이였고, 학교를 뛰쳐나온 10대였고, 취직 자리를 못 구해 애태우던 청년이었고, 이혼과 망명을 겪은 중년이었고, 양말도 안 신고 다니면서 아이들 숙제를 봐 주고 고양이 편지에 성실히 답장을 보내던 노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삶을 따라가다 보면, 사이트 곳곳에서 마주치게 될 계량텐서와 곡률과 사건지평선이라는 낯선 말들도 조금은 더 사람의 온기를 띠고 다가올지 모른다.


다음 장으로 —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아인슈타인의 삶을 따라오면 한 가지 역설과 마주친다. 그는 양자혁명의 문을 연 핵심 인물이면서도, 완성된 양자역학이 자연을 최종적으로 설명한다는 주장에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새로운 과학을 이해하지 못한 노학자의 고집이었을까, 아니면 누구보다 먼저 그 이론의 깊은 문제를 알아본 질문이었을까?

다음 부록에서는 플랑크·보스·드브로이·슈뢰딩거·보어·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의 만남을 따라간다. 광양자에서 EPR과 양자얽힘까지, 상대성이론의 창시자가 양자역학의 탄생과 논쟁에도 얼마나 깊이 서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참고 자료

공통으로 참고한 표준 전기·1차 사료

아래 자료들은 여러 장에 걸쳐 반복적으로 참고했다. 장별 목록에서는 아래 약칭으로 표시한다.

  • [두카스·호프만] Helen Dukas & Banesh Hoffmann, Albert Einstein: Creator and Rebel (Viking, 1972) — 아인슈타인의 비서가 직접 남긴 회고. 1928년부터 그의 사후까지 최측근으로 지낸 인물의 증언이라 신뢰도가 높다.
  • [파이스]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The Science and the Life of Albert Einstein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 프린스턴에서 아인슈타인과 직접 교류한 물리학자가 쓴 학술 전기. 과학적 사실관계와 연대기의 뼈대로 가장 많이 참고했다.
  • [프랑크] Philipp Frank, Einstein: His Life and Times (Knopf, 1947) — 프라하 시절부터 아인슈타인을 알고 지낸 물리학자·철학자의 전기.
  • [아인슈타인 자전 노트] Albert Einstein, "Autobiographical Notes," in Paul Arthur Schilpp (ed.),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1949) — 아인슈타인 본인이 만년에 직접 쓴 회고. 나침반 일화 등 유년기 기억의 1차 출처.
  • [연애편지집] Jürgen Renn & Robert Schulmann (eds.), Albert Einstein/Mileva Marić: The Love Letter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가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 원문.
  • [본 서한집] The Born-Einstein Letters, tr. Irene Born (Macmillan, 1971) — 막스 보른과 주고받은 실제 편지 모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유령 같은 원격작용" 등 인용의 1차 출처.
  • [PAW 서신] Princeton Alumni Weekly, "Albert Einstein Answers His Mail" 및 관련 기사 —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주고받은 어린이·일반인 서신 기록.
  • [QI] Quote Investigator(quoteinvestigator.com) — 아인슈타인 관련 유명 인용문들의 출처를 추적한 자료. 이 글에서 "출처 불명확"으로 표기한 어구를 가려내는 데 사용했다.

장별 세부 참고 자료

1장 (울름의 아이) — 출생·뮌헨 이주·삼촌 야콥의 사업: [파이스], [프랑크]. 말이 늦었다는 마야의 회고: [파이스](마야 아인슈타인의 미출간 전기 스케치를 부분 인용한 대목에 근거). 나침반 일화: [아인슈타인 자전 노트]. 삼촌 야콥의 "대수학 사냥" 비유: 여러 인터뷰·전기에 반복 인용되는 아인슈타인 본인의 회고(정확한 최초 출처는 확정하지 못했으며, 1929년 무렵의 언론 인터뷰류에서 자주 등장한다). 루이트폴트 김나지움·막스 탈메이 일화: [프랑크], [파이스].

2장 (방황하는 10대와 취리히) — 밀라노 이주·자퇴 진단서·ETH 낙방·아라우 유학: [파이스], [프랑크]. 국적 포기(1896)·스위스 시민권(1901): 표준 연대기, [파이스]. 밀레바 마리치와의 만남과 "상대운동" 편지 인용: [연애편지집]. 민코프스키의 "게으른 개" 발언: 여러 물리학사 서술에 반복 등장하는 일화(정확한 최초 증언자는 특정하지 못함 — 확정 필요). 올림피아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모리스 솔로빈이 남긴 서한·회고(Lettres à Maurice Solovine, 1956).

3장 (무명의 시절, 그리고 특허청) — 졸업 후 실업·리제를 출생: [연애편지집], [파이스]. 특허청 채용 경위(그로스만 아버지의 추천, 특허청장 프리드리히 할러): 스위스 지적재산청(IGE) 자체 역사 기록("Einstein" 항목, ige.ch). "세속적인 수도원" 표현: 아인슈타인 본인의 후일 회고로 여러 전기에 인용([파이스], [프랑크]). 박사논문이 너무 짧아 반려될 뻔한 일화: 여러 전기에 반복 등장하는 일화(정확한 1차 출처 미확정).

4장 (기적의 해, 1905) — 4편의 논문과 그 내용: 표준 과학사, [파이스]. 막스 플랑크의 조기 인정: [파이스]. 막스 폰 라우에가 젊은 아인슈타인을 알아보지 못한 일화: [파이스] 및 여러 전기에 반복 등장(대화의 정확한 재현 여부는 판본마다 다름 — 정황 자체는 신뢰도가 높음). 바이올린 관련 발언("내 인생 가장 큰 기쁨…", "물리학자가 아니었다면…"): 1929년 무렵의 언론 인터뷰류에 반복 등장하는 아인슈타인 본인의 말.

5장 (인정, 그리고 갈라지는 결혼 생활) — 베른·취리히 교수직 이동, 특허청 퇴직 시 "거위 모형" 일화: [두카스·호프만] 계열의 전기적 일화(정확한 최초 증언자는 확정하지 못함). 프라하·취리히·베를린 이동과 밀레바와의 불화: [연애편지집], [파이스].

6장 (전쟁 속에서 완성된 이론, 그리고 재혼) — 1915년 11월 네 차례 강연과 힐베르트와의 관계: [파이스]; 우선권 논쟁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은 Tilman Sauer의 1998년 연구도 함께 참고. 엘자와의 재혼·이혼 조건(노벨상금 조항): Maria Popova, "Einstein's Divorce Agreement and the Nuanced Messiness of the Human Heart," The Marginalian; "What happened to the Nobel Prize money?," einstein-website.de. 1919년 일식 관측: Smithsonian Magazine, "One Hundred Years Ago, Einstein's Theory of General Relativity Baffled the Press and the Public"; Sky & Telescope, "'Lights All Askew': How a Solar Eclipse Made Einstein Famous". 제자 일제 로젠탈슈나이더의 회고("하느님이 안되셨겠지요…"): Ilse Rosenthal-Schneider, Reality and Scientific Truth: Discussions with Einstein, von Laue, and Planck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0). 헬렌 두카스가 비서로 합류한 시점(1928): 표준 전기, [두카스·호프만]. 에딩턴의 "세 번째 사람" 농담: [QI] 계열 자료에서도 정확한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일화로 분류됨.

7장 (스타가 된 과학자) — 노벨상 발표 경위(1922년 11월, 보어와 동시 발표): 노벨상 공식 기록, 표준 과학사. 일본 순회강연 중 수상 소식을 접한 경위: [파이스].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 발언: Charles Chaplin, My Autobiography (1964). 바이츠만과의 미국행과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 발언: Chaim Weizmann, Trial and Error (1949). "뜨거운 난로" 비유의 출처 불명확성: [QI], "Quote Origin: Relativity: A Hot Stove and A Pretty Girl."

8장 (가장 오래간 논쟁 — 보어와 주사위)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1926년 보른에게 보낸 편지): [본 서한집]. 솔베이 회의 논쟁: [파이스], 표준 물리학사. EPR 논문: A. Einstein, B. Podolsky, N. Rosen,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ical Review 47 (1935), 777–780. "유령 같은 원격작용"(1947년 편지): [본 서한집]. 벨 부등식 검증 및 그 역사적 의의: 표준 현대물리학사(2022년 노벨 물리학상이 이 검증 실험에 수여된 사실도 참고).

9장 (망명) — 1922년 발터 라테나우 암살과 아인슈타인에 대한 위협: 표준 전기([파이스], [프랑크])에 기록된 사실. 1933년 히틀러 취임 당시 캘리포니아 체류 및 유럽행 발언: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Albert Einstein Quits Germany, Renounces Citizenship" (newspapers.ushmm.org); Shapell Manuscript Foundation, "Einstein Renounces German Citizenship and Becomes Outlaw in Nazi Germany"; The Times of Israel, 관련 기사. 카푸트 별장 수색과 식칼 압수 일화: 여러 전기에 반복 등장(세부 표현은 판본마다 다름). 영국 노퍽에서의 은신과 경호원 사진: 표준 전기 및 당대 보도사진 기록.

10장 (프린스턴의 현자) — 고등연구소 합류, 엘자 사망(1936), 마야의 합류: [두카스·호프만], [파이스]. 옷차림·양말 관련 일화: [두카스·호프만]. 주소를 잊고 전화를 건 일화: 프린스턴 지역사회에 구전되는 일화로 여러 판본이 존재 — 확정된 1차 출처 없음. 항해 실력 관련 일화: Roger Highfield & Paul Carter, The Private Lives of Albert Einstein (1993) 계열의 전기에 기록. 이웃 소녀의 숙제 도움 일화: Princeton Alumni Weekly, "The Gentle Touch of Genius." 쿠르트 괴델과의 우정 및 "특권" 발언, 시민권 시험 일화: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Gödel and Einstein: Friendship and Relativity" 등 여러 정리 기사에서 반복 확인. 아들 한스 알베르트·에두아르트와의 관계: Highfield & Carter, The Private Lives of Albert Einstein. 실라르드-아인슈타인 서한과 루스벨트 대통령: Wikipedia "Einstein–Szilard letter" 항목이 인용하는 문서 기록 및 관련 학술 자료; Haaretz, "1939: Einstein Makes His Biggest Mistake." 폴링에게 후회를 전했다는 발언: 폴링 본인의 회고로 여러 2차 자료에 인용되나 폴링 단독 전언에 의존 — 독립적 교차 확인 자료는 확보하지 못함.

11장 (만년의 발언들) —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의 1946년 모금 전보 문구: 표준 사료, 여러 아카이브에 원문이 남아 있음. 폴 로브슨과의 친분, 링컨 대학교 연설("백인의 병"): 표준 전기 및 해당 연설 기록. 1953년 프라우엔글라스 편지와 매카시즘 논란: 뉴욕 타임스 보도(1953) 및 표준 전기. FBI 파일 분량(1,400쪽 이상)과 결과: FBI가 정보자유법에 따라 공개한 아인슈타인 파일("FBI Records: The Vault") 및 이를 다룬 다수의 언론 보도. 이스라엘 대통령직 제안과 고사: Snopes, "Was Albert Einstein Once Asked To Be President of Israel?"; Britannica, "The Time Albert Einstein Was Asked to be President of Israel." 어린이 편지 답장들(동물 질문, 고양이 편지 등): [PAW 서신].

12장 (마지막 날들과 남는 것) — 대동맥류 파열과 오토 나탄이 전한 발언: 표준 전기(오토 나탄은 아인슈타인의 유언집행인으로, 그의 증언이 여러 2차 자료에 인용됨). 마지막 순간과 독일어 유언: 표준 전기, [두카스·호프만]. 통일장이론 미완성과 임종 시 책상의 방정식: 표준 전기 및 아인슈타인 문서고(Einstein Papers Project) 자료에서 반복 언급.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선언문 원문(1955년 7월 발표). 부검과 뇌를 둘러싼 논란: HCPLive, "Controversy Surrounding Albert Einstein's Autopsy"; Wikipedia "Thomas Stoltz Harvey" 항목; CBC Documentaries, 관련 다큐멘터리; Hektoen International, "Einstein's last wish ignored."

출처와 저작권 안내

위 목록에서 "정확한 1차 출처를 확정하지 못함" 또는 "여러 판본이 존재"라고 표기한 일화들은, 본문에서도 "~라고 전해진다",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는다" 등의 표현으로 동일하게 신중을 기했다. 반대로 편지·연설문·논문처럼 원문이 남아 있는 인용은 위 목록에 구체적 서지사항을 명시했다. 이 구분은 앞으로 사실관계를 추가로 검증하거나 원문을 대조할 때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참고할 수 있다.

저작권 관련 일러두기: 아인슈타인은 1955년에 사망했으므로 저자 사후 70년을 적용하는 독일·EU에서는 2026년 1월 1일부터 보호기간이 만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공개 여부는 이용 국가, 최초 발행 시기, 편집·번역·사진의 별도 권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사이트에 원문이나 자료를 수록할 때에는 개별 저작물의 권리 상태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이 글은 아인슈타인의 편지와 발언을 짧게 번역하거나 재서술했으며 특정 전기 작가의 문장 표현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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